매일신문

[야고부] 방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나 참기 힘든 스트레스 등을 오랫동안 억누르면 우리 몸이 못살겠다고 항변하기 시작한다. 가슴에 돌덩어리라도 얹어놓은 듯 답답하고, 작은 일에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불면증에다 밥은 모래 씹는 것 같고, 자주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신경질'짜증에다 의욕저하….

이른바 '火病(화병)'이다. 화를 참는 일이 장기간 거듭되는 데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성 장애다. 유독 한국인, 특히 여성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는 이 화병(hwa-byung)을 한국인만의 독특한 질환,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등록하기까지 했다.

요즘 우리 사회에 화로 인한 또 하나의 병리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홧김에'식 사건들이다. 홧김에 가족을 구타하고, 홧김에 채무자를 살해하고, 다투다가 홧김에 친구를, 연인을 죽이고,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부지기수다.

분노를 자신에게로 돌리는 '화병'과 달리 '홧김에' 사건들은 화를 다른 사람들을 향해 터뜨리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의 화에는 아무런 죄가 없는 타인들을 분노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홧김에 放火(방화)'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방방재청 자료에 따르면 2002년 2천778건에서 2003년 3천219건, 2006년 3천413건으로 급증했고 올해는 6월 말 현재 벌써 2천896건을 기록, 예년 건수를 크게 웃돌 전망이다. 주로 차량(32%), 아파트 등 주택(28%)이 공격 대상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풀기 위해서'(480건)와 '가정 불화(173건)'가 방화 이유 1, 2위로 나타났다. 최근엔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방화 급증이 또 하나 골칫거리로 부각되고 있다.

대구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방화 다발 도시다.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은 그 정점에 있다. 이후에도 차량 방화사건은 경찰 능력을 비웃듯 꼬리를 물고 있다. 경찰서마다 차량화재전담팀 운영, CCTV 설치, 현상금 등 온갖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귀신같이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추는 얼굴 없는 방화범들에게 번번이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그리스의 초대형 화재나 미국 캘리포니아 대화재도 방화에 의한 人災(인재)로 알려져 있다. 방화가 그릇된 분노와 복수, 異常(이상) 욕구의 무기가 되고 있는 건가.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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