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일현의 교육프리즘] 왜 읽고 써야 하는가?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러시아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안다. 처음 백 쪽 정도까지 읽어 나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라스꼴리니코프인지 라꼴리스코니프인지 아무리 반복해서 외워도 제대로 기억하기가 어렵다. 그 길고도 낯선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지쳐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각하며 읽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그 무거운 주제들이 주는 중압감은 또 얼마나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지치게 했던가. 그러나 처음 도입부를 지나 도도한 장강 같은 줄거리의 흐름에 완전히 몸을 담그게 되면, 그때부터는 밤이 새도록 책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도 우리는 기억한다.

오늘의 영상 매체는 시각과 청각에 직접 호소하며 모든 것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때문에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상 매체는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해결해 주기 때문에 사람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익숙한 아이들은 무엇을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요즘 아이들은 눈과 머리와 몸을 긴장하게 하는 긴 글 읽기를 견디지 못한다. 이들은 독서 대신 컴퓨터를 검색한다. 이들은 정보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권태로움을 해소하며, 검색으로 얻은 대부분 정보는 취사선택의 과정 없이 일회용으로 소비한 후 그냥 배설해 버린다.

많은 학자들이 영상 매체에 길들여지면 상상력이 고갈되고 창의력이 급격히 저하된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사회는 영상매체가 활자매체를 압도하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그 역기능을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전 작품을 인내하며 읽고, 명시를 음미하며 암송하는 행위 등 활자매체를 이용한 지적인 훈련을 통해 지고한 정신의 희열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독서와 글쓰기는 상상력과 사고력의 지적 근육을 강화시켜 준다. 한 편의 완결된 글을 써 본 사람은 글을 쓰는 행위가 왜 뼈를 깎는 아픔이고, 그 고통 끝에 나온 작품이 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취감을 주는지를 안다. 한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제기된 문제와 수많은 정반합(正反合)의 내적 투쟁을 벌이며, 치열하게 변증법적인 지양(止揚)의 과정을 거쳐 본 사람만이 찬란한 정신의 성숙에 이를 수 있다.

일본이 43년 만에 실시한 초중학생 학력평가에서 TV와 인터넷을 즐기는 학생의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결과를 발표한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중국이 왜 학생들에게 공자와 맹자를 암기하게 하고, 프랑스 지식인들이 왜 전국적인 초고속 인터넷을 반대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상상력과 직관력,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윤일현(교육평론가, 송원교육문화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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