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 질환으로 몇 년 동안 치료받고 있던 한 젊은이가 군 입대 신체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며 진료실을 찾았다. 오랫동안 약물 치료가 필요하더라도 완치가 가능한 질환인 경우는 치료를 위해 군 입대를 1년간 유예해 주고 치료 뒤 건강해지면 다시 신체검사를 받게 하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도록 돼 있어 다음 해에도 같은 상황이라면 대개 군복무가 면제된다. 일부 젊은이들 중에는 군 면제를 위해 고의로 질병을 치료하지 않거나 치료에 소극적인 경우가 있어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난감하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적절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의 경과가 호전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병사용 진단서를 작성하면서 문득 군 시절 한 병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군의관으로 전방 부대에 근무하던 중 호흡 곤란으로 의무대에 실려 온 한 병장을 진찰한 적이 있다. 청진으로 쉽게 기관지 천식을 진단할 수 있었으며 천식은 군 면제뿐만 아니라 조기 전역도 가능하므로, 안타까운 마음에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는지 자세히 물어봤다. 그랬더니 어릴 때부터 이미 천식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젊은이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이 사실을 숨기고 군대에 오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이미 병장으로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치료만 해 주고 전역할 때까지 모르는 일로 덮어 주기를 연방 부탁했다.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회피하는 일부의 젊은이들과 달리 이 친구의 반듯하고 건실한 생각이 너무 기특해서 그 뜻에 따르기로 약속하고 대신 약은 꼭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 얼마 뒤 폭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새벽, 의무대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철책을 맡고 있는 대대에 산사태가 나서 병사들이 자고 있던 막사가 매몰됐다는 연락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과 폭우로 차선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의무병들과 함께 군용 구급차를 몰고 전방 사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불어난 강물에 잠긴 잠수교를 어렵게 건너고 진흙 뻘을 걸어서 사고 현장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도착 당시 부대는 흙에 파묻혀 매몰된 사상자와 부상자들의 비명소리로 그야말로 아비규환 자체였다.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부상 병사들을 치료하고 후송하고 있던 중 날이 밝았으며 뒤이어 들어온 다른 부대 지원 군의관 및 공병 부대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환자 후송과 막사 복구가 탄력을 받아 진행되고 있었다. 한 끼도 먹지 못하고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병사들을 정신없이 돌보면서 지쳐 있던 그날 오후, 공병대 중장비가 무너진 막사 더미를 파헤치던 중, 갑자기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를 포함한 모든 군의관들은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달려가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마지막 생존자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던 중 옆에 있던 한 장교가 "모레가 바로 전역인 ○○○ 병장 아냐?"라는 말에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과 놀라움으로 자세히 보니, 얼마 전에 천식으로 의무대에 찾아왔던 바로 그 병장이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어떻게든 이 친구는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몇 시간의 심폐 소생술로 겨우 맥박과 혈압을 정상화시킨 뒤 직접 후방 병원 군의관들에게 환자를 인계하고 지쳐 쓰러졌다. 그러나 며칠 뒤 긴급사태가 수습되고 나도 기운을 차릴 즈음, 그 병사는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가끔씩, 매스컴에서 군 면제를 위해 질병을 조작한 사건들을 접한다. 매년 연말이면 어떻게든 군대에 안 가려고 이것저것 검사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병장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씁쓸하다.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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