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은 남성지배적인 사회질서가 잘 유지되는 시대에는 마릴린 먼로, 브리짓 바드로 같은 백치미를 풍기는 요부를 창조한다. 반대로 자신의 우월성에 자신 없어지면 살로메, 클레오파트라 같은 '팜므 파탈(치명적 여인)'을 부각시킨다."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제인 빌링허스트 저)에 기술된 내용입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요부'는 여성을 사회경쟁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위축된 남성들의 표현입니다. 강렬한 성욕을 품으면서 또 한편 자신의 권위가 무너질까 두려하는 남성들. 그들은 '요부'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한 명의 '요부'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루리코'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미모를 지닌 루리코. 그녀의 아름다움은 '진주'에 비유됩니다. 깊은 바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천연진주 같은, 볼수록 되살아나는 신선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입니다.
'졸부' 가츠히라 쇼다(쇼다)는 루리코와 그녀의 애인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쇼다는 돈의 힘에 대해 비웃는 루리코의 애인에게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 방법은 그들이 비웃은 재력으로 루리코를 빼앗는 것입니다. 쇼다는 루리코 아버지의 빚 보증서를 모두 사들여 그녀 아버지에 대한 채권자가 됩니다. 그리고는 루리코가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면 채무를 변제해주겠다고 제의합니다. 첫사랑을 잃게 만들고, 가문에 위협을 준 쇼다에게, 루리코는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닌 쇼다와 결혼합니다. 당시 19살 이었던 루리코는 스무살 이상 차이 나는 남편, 쇼다로부터 갖은 방법을 동원해 처녀성을 지킵니다. 각 방을 쓰면서 쇼다의 정신지체장애 아들을 이용, 불침번을 서게 하기도 합니다. 쇼다의 아들은 아내가 될 번한 아름다운 새어머니를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루리코는 '삼각관계'가 됩니다.
몇 개월 뒤 루리코의 매력을 견딜 수 없게 된 쇼다는 그녀를 겁탈하려 합니다. 그 순간 루리코를 구하기 위해 아들이 나타나고, 아들과 아버지는 싸웁니다. 지병을 앓고 있던 쇼다는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루리코는 몸과 마음을 지키면서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복수는 오히려 허망함만 안겨줍니다.
황폐한 마음의 루리코, 이제 복수할 상대로 남성의 오만함을 꼽습니다. 처녀로의 신선함과 미망인의 요염함을 겸비한 그녀는 뭇 남성들에게 공작 같은 날개를 활짝 펼칩니다. 재력과 미모, 게다가 지적인 루리코의 거미줄에는 수많은 남성들이 엮여들고, 스스로의 처지를 절감하면서도 감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농락하기 위해 남성들을 유혹하고, 그 자체를 즐겼던 루리코는 자신을 사랑했던 한 남성에게 살해당합니다.
'진주부인'은 1920년 도쿄일일신문과 오사카 매일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2002년에는 후지 텔레비전 계열에서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80년이라는 물리적인 거리감을 극복하고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또 책이 복간된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성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이 달라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습니다.
영국의 '트레이시 에민'은 그녀의 작품 속에 102명의 잠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의 명단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강간당한 과거, 낙태경험 등 자신의 과거를 작품으로 표현하면서 스스로를 상품화시키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쓰레기' '창녀'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인 찬미자도 있습니다. 그녀는 극과 극의 평가를 떠안았습니다.
'카사노바'는 100여명의 여인과 쾌락을 즐겼습니다. 남성들은 그를 비난하기보다 추종합니다. 동경합니다.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라는 책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계몽주의자이며, 탁월한 벤처사업가로, 천재적이며 창의적인 재능을 지닌 독보적인 존재로 재해석됩니다.
두 사람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여성과 남성, 그것이 차이입니다. 차이가 아니라 차별입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삼아 떠벌립니다. 오히려 부풀리기까지 합니다. 반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편력을 숨기려고 합니다. 간혹 남성편력이 밝혀지는 여성에게는 '요부'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요부' 루리코는 자신을 비난하는 남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성들은 이 여성에게서 저 여성으로 마음을 옮겨가며 태연히 행동하면서, 여성이 한 남성에게서 다른 남성으로 마음을 옮겨가면 즉시 비난하죠. 여성이 남성을 농락했다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남성이 여성을 농락할 때는 몸도, 마음도, 명예도, 절개도 모조리 유린하지 않았나요?"
전은희(출판부) kongone@msnet.co.kr
◇ 기쿠치 칸은...
1888년 다카마츠 시 출생. 1916년 교토대학 졸업. 기자로 근무하면서 단편 '원한을 넘어서' '어떤 사랑이야기' 발표. '진주부인'으로 유행작가가 된 후 1923년 '문예춘추' 창간. 문예협회장 역임. '문단의 대가'로 칭송. '아쿠타가와 상' '나오키 상'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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