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유리지갑들의 가을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서슬퍼런' 국정감사도 3일로 사실상 끝난다. 특히 올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국정감사 자체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우려가 애초부터 많았다. 예상했던 대로 한나라당이나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기선 제압을 위해 서로 상대후보 흠집내기에 바빠 감사는 수박 겉핥기에 그쳤고, 감사를 받는 기관이나 국감 의원들도 건성이었다. 의원들은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 공천을 위해서 자기당 대선후보 보호에 동원되느라 감사는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고 피감기관들은 여기에 보답, 의원 대접(?)에만 신경썼다. 피감기관들은 세금을 물 쓰듯 하며 접대에 열을 올렸고, 그러다 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 일부 의원들과 피감기관들과의 술 파티는 이번 국감 때도 빠지지 않았고 '유리지갑'의 월급 생활자들을 또다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미 이 땅의 유리지갑들은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일부 공기업이나 정부산하 및 공공기관에 다니는 '신의 자식'들이 국민의 돈으로 벌인 성과급 나눠먹기와 해외유학·연수잔치, 흥청망청 살림살이에, 연일 터지는 각종 비리에 넌더리 난 터인데 국감 의원들의 술판까지 세금내고 지켜봐야 하니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한발 더 나아가 내년에 또 세금이 오른다니 무슨 살맛이 날까.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 2003년부터 3년 동안 1인당 근로소득세 부담액이 2002년에 비해 42.8%나 늘어났고, 내년에도 근소세 부담이 9%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다. 서민들 아우성 속 그동안 공무원들은 또 얼마나 더 뽑았는가. 그런 판에 현 국세청장과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이 평범한 유리지갑들의 1년치 연봉을 웃도는 뇌물을 주고 받았단다. 유리지갑 털어 세금냈더니 기껏 한다는 것이 뇌물 잔치판이니 유리지갑들은 이 가을, 무슨 흥이 나고 세금인들 내고 싶을까.

'신의 자식'들의 잔치비용으로, 의원들의 술값으로, 뇌물받는 국세청 간부들 녹봉 주느라 줄줄 새는 나라의 곳간을 채우려 꼬박꼬박 얇은 월급봉투를 바쳐야 하는 유리지갑들의 속타는 심정을 어찌 그들이 알까. 지갑속 티끌 먼지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지갑이 깨질 직전이다.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니다.'(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는 말처럼 '국민의 돈은 모두의 돈이니, 누구의 돈도 아니다.'란 뜻인가. 유리지갑 봉급자들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최근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위 지방의회 의원들의 의정비 인상이라는 '도미노' 현상은 또 어떻고.

무보수 명예직으로 시작한 지방의원들이 지난해부터 유급제로 전환, 월급 형태로 의정비를 받으면서 이젠 마치 노조가 철마다 임금인상 요구하듯 의정비 올리기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있는 듯하다. 의정비는 해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형편에 맞게, 어디까지나 살림살이 규모에 맞게 해야 할 것임에도 곳간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너도나도 올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쪽박이야 깨지든지 말든지.

풀뿌리 민주주의의 출발인 지방의원들에서부터 나라 살림 감시하는 국회의원에다 국민세금으로 호의호식하는 '신의 자식'들까지 너도나도 앞다퉈 '내돈도 아니고 네돈도 아닌' 국민세금으로 '철지갑' 채우기 경쟁에 나선 것 같다. 그들의 부풀어지는 철지갑 두께만큼이나 유리지갑은 얇아지거나 깨어져 산산조각날 운명이다.

이들에게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 같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 마을 공동으로 쓰는 목초지의 풀의 양은 생각지도 않고 이왕 같이 뜯어먹을 풀이라면 자신의 가축 한 마리 더 늘려 뜯게 하려다 너도나도 가축을 늘리는 바람에 마을 가축 모두 굶주리게 된다는 비극이 남의 얘기같지 않다.

옛날 春秋時代(춘추시대) 아낙네가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정치(苛斂誅求·가렴주구)를 피해 탐관오리의 손이 미치지 않는 태산 깊은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호랑이에게 시아버지와 남편, 자식 목숨까지 잃고도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수천 년 전 옛 아낙네의 세상 등진 이유와 우울한 가을을 맞는 이 땅의 유리지갑들의 마음이 무엇이 다를까. 올 대선에서는 유리지갑이나 두둑이 채워줄 후보 어디 없소?

정인열 정치부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