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베스트셀러/ 이민희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소설(小說)'이라지만 이 소설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 주제가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고, 거기 등장하는 인물이 중심이 될 수도 있다. 문체를 논할 수도 있고, 시대상을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상당히 색다른 시각으로 소설의 세계를 탐구한다. 지은이가 눈을 기울인 것은 책의 제목대로 '조선의 베스트셀러'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부제)이라는 당시에 대두했던 소설의 유통에 분석의 칼을 들이댔다.
'세책(貰冊)'이란 요즘 말로 '도서 대여'를 뜻한다. 당시의 세책점에서는 전문 필사자가 깨끗하게 베껴 쓴 책[筆寫本]을 고객에게 빌려 주고 대여료를 받아 이윤을 챙기는 상업적 도서 유통 방식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허구의 내용이긴 하지만 영화 '음란서생'에서 반영됐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윤서(한석규 분)가 권력과 당파싸움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권태로운 생활을 하던 중에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계기도 비밀스런 세책점에서 시작됐다.
윤서는 저잣거리 유기전(鍮器廛)에서 유통되던 '난잡한 소설책'을 읽고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낀 뒤 '추월색'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소설을 만들어 내 장안의 화제에 오른다. 윤서의 책은 금세 여성 독자들 누구나 빌려다 읽으려 아우성치는 세책점 최고의 대여책이 된다. 지은이는 책머리에 이를 예로 들며 '실제로 이런 일들이 조선시대에 가능했을까?'라고 질문한다. 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영화적 장치로 꾸며냈을 것이란 생각이 들 만한 내용이 사실은 현실 속에 존재했다는 말이다.
지은이의 연구에 따르면 세책은 단순히 '존재했다.'는 차원을 넘어 상당히 번성했다. 임진왜란 전후로 유입된 중국 통속소설이 반윤리적이고 비사실적이며 음란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되거나 배척된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소설 읽기에 빠진 부녀자들이 '혹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혹 빚을 내면서까지 서로 싸우듯이 빌려 가지고 가 그것으로 긴 해를 보냈다.'(여사서 서문)고 할 정도였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얘기를 보면 이재에 밝은 상인들이 이런 점을 놓쳐 버릴 리가 없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필사한 책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해 책을 팔던 '책쾌(冊人+會, 서적중개상)'는 "서적 유통에 관한 영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직접 책을 필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필사하게 하면서 세책업에 뛰어들었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대략 17세기 후반 조선에서도 시장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소설 또한 상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8세기 중반 세책업이 생겨나면서 성행했다.
최남선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향목동의 한 세책업소에 남아 있던 소설책을 조사한 결과가 총 120종 3천221책이었으니 실제로 유통됐던 작품 규모와 종수가 훨씬 더 많았을 것임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지은이가 이런 세책에 대해서 '조선 후기 독서풍경', '세책, 조선의 문화상품', '향목동 세책 거리를 걷다', '세책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등으로 나누어 풀어가는 내용 중에는 읽는 이의 흥미를 끌기에도 충분한 것이 많다.
세책본 고소설이 유통되기 어려웠던 지방에서는 소설 낭독을 전문으로 하던 강독사(講讀師)가 인기를 얻었다. 세책 과정에서 손을 많이 타는 속성상 쉽게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빳빳한 종이에 기름을 먹이는 등 종이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됐다. 분량이 긴 탓에 분책을 해놓으면 고객들이 계속해서 빌려다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수입을 올려주는 장편소설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일부 독자들은 빌린 책에 낙서나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얘기들을 읽다 보면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이 당시에도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벌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지은이는 중국, 일본, 유럽의 세책 문화도 풀어내며 세책의 번성이 산업발달과 함께 세계의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그러면서도 각 나라에 따라 특수하게 전개됐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책에 대한 개론서 성격이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는 내용이다. 184쪽. 9천 원.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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