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을추억, 첫사랑] 가을빛 물들면 찾아오는 '열병'

'사랑'이란 말은 참 진부하고 식상하다. 그러나 '첫사랑'은 다르다. 첫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10년전 혹은 20년전 내 청춘에 불쑥 찾아들어온 처음 느껴 본 사랑이었다. 그 땐 삶의 전부처럼 여겨졌던 첫사랑의 연인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내 기억속에 각인돼있다. 가을 빛으로 곱게 물든 단풍잎이 하나둘씩 떨어지면 한 번쯤은 옛사랑의 추억이 어슴푸레 되살아나기도 한다.

흐린 기억속의 그녀와 그. 가슴속에 깊숙이 꼬깃꼬깃 묻어두었던 첫사랑의 추억. 당신도 기억하고 있는가.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요즘 영화는 첫사랑이 화두다. 영화 '사랑', '행복', '엠(M)' 등이 그러하고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FT아일랜드의 노래도 그렇다. 그 모든 첫사랑의 종착지는 이별이다. 사랑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필요없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목부터 진부한 영화 '사랑'은 첫사랑을 평생 잊지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평생 지켜주겠다는 약속때문에 교도소를 갔지만 그녀는 사라졌다. 그리고 7년후 윗사람의 여자로 나타난 그녀. 첫사랑의 기억에서 자유롭지못한 영혼들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엠(M)' 역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쯤은 거쳐가는 열정이지만 어느새인가 사라져가는 것이 첫사랑이다. 유치하다고? 유치한 것 같은 사랑이지만 그 유치함 속엔 사람들이 가져야할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고 이면세 감독은 말한다. 누구도 첫사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충격은 각각 달랐지만 말이다.

첫사랑은 '성년식'과 같다. 가슴아프게 할 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사랑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할 성장통이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o.kr

▨ 첫 사랑의 네가지 유형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는 첫사랑 엘레나를 3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산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는 죽어가면서 소년에게 업혀 진흙물이 묻은 옷을 그대로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투게르네프의 소설 '첫사랑'이 있고, 김혜수가 주연한 한국영화 '첫사랑'도 있다. 수많은 유행가에서도 첫사랑은 단골 소재다.

이 가을, 사람들은 첫사랑을 어떻게 생각할까? 네가지 유형별로 나눠봤다.

▶첫사랑은 평생 가슴앓이다

서보성(38·대구시 중구 남산동)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서실에서 만난 여학생이 첫사랑이다. 긴 생머리와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을 보는 순간 이상형이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이름과 자리를 알아내는데 2주의 시간이 걸렸다. 밤을 새면서 장문의 편지를 써서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대구시내 레스토랑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약속시간 20분이 지날 즈음 그녀가 나타났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만남은 7년동안 이어졌다. 서 씨는 선물을 주는 이벤트를 자주 열어 그녀를 기뻐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자친구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서 씨는 "여자친구를 소유하겠다는 욕구가 너무 강했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서 씨는 여자친구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보고 싶어 전화했다가 끊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여자친구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가 들켜 부부싸움도 했다. 14년이 흐른 지난해 여름에 첫사랑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결혼해서 두 아이가 되어 버린 첫사랑을 보는 순간 다가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서 씨는 "첫사랑을 평생 못 잊겠다."면서 "첫사랑의 사진을 책상 서랍에 숨겨두고 한 번씩 꺼내보면서 추억에 빠진다."고 털어놨다.

▶첫사랑은 삶의 비타민이다

권용수(41·대구시 남구 대명동) 씨의 첫사랑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교생선생님이다. 선생님은 60여 명의 학생들 가운데 자신을 유난히 귀엽게 봐줬다. 다른 아이들이 짓궂게 굴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과 후 분식집에서 떡볶이도 함께 먹었다. 자신보다 대여섯살 연상이어서 누나처럼 느껴졌다. 교생 선생님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잘 보이려고 옷차림에도 신경썼다. 착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보이고 싶었다. 권 씨는 "이성에게 처음으로 잘 보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첫사랑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교생실습이 끝난 뒤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면서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1년 동안 편지를 썼다. 전화통화도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선생님이 잘 계실까 궁금했다. 그렇게 못 잊을 것 같던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잊어져갔다. 권 씨는 "첫사랑을 평생 못 잊는다는 남자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떠올려보는 첫사랑은 삶의 비타민"이라고 말했다.

▶첫사랑은 가슴속에 묻어버려라

김정숙(가명·51·여) 씨에게 첫사랑의 추억은 '옛 고향같은 그리운 존재'다. 마음이 쓸쓸할 때는 한 번씩 첫사랑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스물두 살 대학 3학년, 꽃 같은 나이에 찾아 온 첫사랑. 기다려달라는 뜻으로 금반지커플링을 해주고는 첫사랑은 군에 가버렸다. 첫 면회를 가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사소한 일로 자존심을 상했다. 그 이후 서먹서먹해졌고 결국 그가 제대한 후 함께 수성못에 가서 커플링을 던져버렸다.

첫사랑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행복하다. 첫사랑은 그녀에게 달콤쌀싸름한 초콜릿 맛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문득문득 그의 현재 모습이 궁금했다. 20여 년이 지난 후, 그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그가 운영한다는 가게를 찾아갔다. 출장을 간 그를 만나지는 못하고 가게에 앉아있는 그의 부인을 봤다. 그는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만나지않은 것이 더 좋았다. 사랑했던 그때의 기억을 갖고 있는데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못한 채 변해버린 중년의 그를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첫사랑은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버려라."

▶첫사랑보다 현재의 사랑이 더 중요

심정훈(34·대구시 동구 신기동) 씨는 재수시절 학원에서 만난 동갑내기가 첫사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름대로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당시에는 첫사랑 그녀가 심 씨의 모든 것이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처럼 심 씨는 그녀와 헤어졌다. 헤어지고 1년 뒤 도심에서 우연히 만났다. 심 씨는 "서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멍했다."면서 "한동안 옛 추억이 생각나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심 씨는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 라는 말을 믿지는 않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에는 한 번씩 생각난다. 심 씨는 "문제는 첫사랑이냐 둘째 사랑이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사랑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면서 "아무래도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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