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뇌졸중 할머니의 백혈병 손녀사랑

민정 양 돌보는 한숙자씨

▲ 초등학교 2학년인 민정이는 백혈병을 앓고 있지만
▲ 초등학교 2학년인 민정이는 백혈병을 앓고 있지만 '시근'이 멀쩡하다. 손녀 생각에 마음이 아파 눈물을 글썽이는 한숙자(56) 씨의 볼을 민정이가 닦아주고 있다.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초등학교 2학년인 민정(가명·8)이는 부끄러운 듯 할머니 등 뒤에서 나올 줄 몰랐다. 할머니의 나이는 이제 쉰여섯이었지만 힘든 세월이 남긴 흔적인지 예순을 훌쩍 넘은 모습이었다. 손 마디마디는 투박했고 얼굴과 팔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반영하듯 얼굴은 거칠었고 두 번이나 찾아온 뇌졸중으로 대화도 어려웠다.

"제 잘못이면 제가 벌을 받아야하는데 왜 이리도 몹쓸 병이 손녀에게 달라붙는지…." 혀를 끌끌 차며 말문을 연 할머니의 삶은 온갖 상처로 점철돼 있었다. 불행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듯했다. 민정이의 백혈병 역시 그녀 혼자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 같은 것이었다. '행복'이란 단어가 비껴간 수십 년,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난 세월을 풀어내는 그녀는 잔뜩 지친 모습이었다.

"어미는 민정이를 낳은 지 석 달 만에 집을 나갔어요. 우리는 가난했거든요. 둘째 아들이 군에서 탈영까지 하며 맞이한 며느리였는데 참으로 매몰차게 집을 나갔습니다. 얼마 안 돼 둘째도 지 마누라를 찾겠다고, 부모가 해준 게 뭐가 있냐며 가슴에 못을 박고 뛰쳐나가더군요. 노름만 하는 아비와 매 맞는 어미만 보고 자란 아들이라 행실이 어긋나도 말릴 방도가 없었지요. 술을 마셔 만신창이가 돼 들어와 돈을 내놓으라는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곁엔 아비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헛된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남의 집 식모살이에, 벽돌 공장 인부로 종일 일하며 집을 비웠던 게 화근이었지…."

핏덩이인 민정이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그녀는 남편 몰래 모아둔 돈으로 지하 단칸방을 구했고 택시를 몰던 첫째 아들에게 돈을 받아 생활했다. 그런데 민정이가 세 살이 됐을 때 백혈병이 찾아왔다.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다. 그녀는 집 나간 어미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그 거짓말이 진짜처럼 손녀에게 다가왔다. 1년 동안의 항암치료를 견뎌낸 민정이는 방사선 치료를 받던 어느 날 "나 이제 하늘 나라에 있는 엄마 만나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

"민정이 병원비는 첫째가 카드빚을 냈지요. 자가 골수이식비만 2천만 원이 들었습니다. 약값과 입원비, 차비까지 매달 빚은 늘어갔고 결국 첫째는 신용불량자가 돼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지요. 자식 둘에 아내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첫째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래요, 가장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게지요. 술로 위안을 찾던 첫째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지금은 어느 한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불행은 끝도 없이 몰아쳤다. 민정이가 자가 골수이식으로 겨우 정신을 차릴 무렵 할머니마저 의식을 잃었다. 뇌동맥류. 뇌동맥이 실타래처럼 엉켜 터져 뇌졸중으로 발전하는 위험한 병이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 처지였다.

4일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만난 민정이의 할머니 한숙자(가명·56·여) 씨는 손녀와 자신의 옷가지를 가방에 담고 있었다. "그동안 미뤄왔던 뇌동맥류 수술을 하기로 했어요. 이미 두 차례나 터져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하네요." 그녀는 민정이를 위해 수술을 결심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병원비로 진 빚만 4천만 원을 훌쩍 넘겼다. 병원에서 만났던 한 자선단체가 무상으로 빌려준 집에 얹혀 사는 이들에게 4천만 원은 너무나 큰 돈이었다. "민정이 클 때까지만이라도 살아야 할 텐데…." 떨리는 손으로 짐을 싸는 그녀의 뒷모습에선 삶의 위태로움이 묻어났다.

저희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 대구은행 (주)매일신문사입니다.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