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폐액면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 목소리 커진다

외국인 셈계산 헷갈려…수출땐 고액 오해받고 단위 커져 번역도 곤혹

대학생 S(22)씨는 영어회화학원에서 외국인 강사와 대화할 때 '숫자'만 나오면 짜증이 난다. S씨가 경영학을 전공하는만큼 우리나라 물건 가격, 또는 토지가격 등에 대해 설명할 상황을 자주 만나는데 미국 달러와 달리 우리나라 화폐가치는 워낙 뒤에 '0'이 많이 붙어(미국 1달러가 우리돈으로는 1천 원에 육박하니 '1'로 표시할 수 있는 상황을 '0'을 3개나 얹어야하는 등 더 복잡하게 생각해야함) 숫자 표현할 때마다 진땀을 흘린다는 것.

"외국인 강사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화폐단위가 너무 커 머리가 복잡하답니다. 이제 10만 원짜리도 나온다는데 화폐가치를 조정해야지 이대로 가다간 '0'이 너무 많이 붙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2009년 10만 원권 지폐가 발행될 예정인 가운데 '화폐액면단위 변경(Redenomination)'을 서둘러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원, 10원 같은 편리한 화폐단위를 사장시킨 채 '0'을 여럿 붙인 화폐단위를 주로 쓴다면 향후 몇년안에 화폐표시단위가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을만큼 커지면서 엄청난 혼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 '0'이 도대체 몇개야?

접대가 잦은 영업직 회사원 G(45)씨. 노안(老眼)이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그는 최근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털어놨다. 지난달 바이어를 데리고 7만8천 원 짜리 저녁식사 계산을 했었는데 그 다음달 결제일에 78만 원이 빠져나가는 일이 생겼다는 것.

"눈이 가물가물해서 그냥 대충 봤는데 '0'이 몇 개 있더라고요. 저는 앞에 '7'자와 '8'자만 확인했지요. 그런데 액수를 누르는 식당 주인이 '0'을 하나 더 눌렀나봐요. 요즘 10만 원 짜리 지폐 얘기가 나오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화폐단위에서 '0'을 줄여줘야합니다. 7만8천 원이면 달러로 어림잡아 70달러 정도 밖에 안됩니다. 두자리 단위를 쓰면 편한 것을 우리는 다섯자리나 만들어야하죠. 그러다보니 이런 실수도 나오게되는겁니다."

한국은행 조사결과, 2009년 상반기, 5만원 권과 10만원 권이 발행되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액면권종을 보유하게 된다. 현재 OECD 회원국 가운데 헝가리의 2만 포린트 지폐가 최고액면권종이지만 우리나라에서 5만원 권과 10만원 권이 발행되면 단번에 최고액면권종 1, 2위에 올라선다. 통용화폐 가운데 '0'이 4개나 들어가는 권종을 보유한 국가도 극소수인데 '0'이 무려 5개나 들어가는 10만 원권 지폐가 OECD 국가 가운데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인다는 것.

한국의 10만 원권이 액면가치면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을 제외한 29개국가의 최고액면권종 평균이 원화로 37만 원 가량인 점을 감안하면 10만 원권은 '0'자만 많을 뿐 액면가치는 OECD 국가의 최고액권 가운데 중간수준에도 끼지 못한다.

더욱이 한국경제의 성장속에 이대로 몇년이 더 흐른다면 금융통계의 단위가 너무 커지면서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단위가 나올 수도 있다.

한국은행 금융망을 통한 연간 결제액 규모는 이미 1경 원을 넘어섰고 파생금융 거래 규모의 총액도 경 단위를 돌파했다. 한은은 유동성 통계를 외국통계기관에 제공할 때 '1.8 쿼드릴리언(quadrillion)'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10의 15승을 뜻하는 '쿼드릴리언'이 무척 생소한 단어라 외국인들이 헷갈려한다는 것.

외국의 경우 통계단위 대부분이 10억(billion) 단위로 해결되고 최대치라 해도 1조(trillion) 단위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 통계단위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 '0'을 줄일 수 있을까?

한국은행은 화폐단위변경이 단시일내에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국회 국정감사 등에서 "화폐단위 변경은 가까운 장래에 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정부 당국이 이를 망설이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비용'이다. 화폐단위를 바꾸게되면 우리나라 경제전반의 모든 회계시스템을 고쳐야하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한 소프트웨어 교체 비용 등으로 화폐단위변경 초기 3, 4년 동안에만 무려 3조 원 가까운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더욱이 화폐단위변경을 하면 물가가 올라 서민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다고 '리디노미네이션' 반대론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1천 원을 10원이나 1원으로 내려앉히는 과정에서 작은 화폐단위는 반올림되는 현상이 나타나 각종 물건값이 상승한다는 것.

실제로 '명품값이 싸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품쇼핑을 자주 나갔던 이탈리아 경우, EU 화폐단위 통합 이후 화폐단위가 리라에서 훨씬 가치가 높은 유로로 바뀌면서 물건값이 상승, 많은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명품값이 너무 올랐다"는 불평을 했다.

한편 리디노미네이션은 한국은행 방침대로 당장 시행될 가능성은 없지만 2009년 10만 원권 발행이 시작되면 다시 필요성 논란이 들끓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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