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라는 세월은 참 길다. 무려 525만 6천 분(分). 영화 한 편의 길이를 대략 100분으로 본다면, 52만 5천600 편의 멜로, 코믹, 공포, 스릴러 등 온갖 달콤쌉싸름하고 아기자기하며 때론 허무하고 때론 감격스러웠던 영화들이 우리 생을 스쳐지나간 셈이다. 너무나 인상 깊어서 평생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는가하면,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난 뒤에도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만큼 기억조차 없는 장면도 있게 마련이다. 올해 결혼 10년차를 맞는 부부들.
박철·옥소리 부부의 파경 소식을 들으며 겉으로는 끌끌 혀를 차면서 속으로는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를 생각한다. 시간은 흘렀고, 지금도 흐른다. 다른 행성 출신인 두 인간의 만남과 10년의 지속은 어찌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기적을 이뤄내고 있는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한바탕 전쟁을 치른 느낌
직장인 류모(39) 씨는 결혼 10년에 대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기분"이라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왜 그렇게 악다구니를 써가며 이기려고 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지금은 훨씬 홀가분하다고 했다. 현재 상황이 종전인지 휴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결혼 후 10년간의 평균 혼란도를 7, 8쯤으로 본다면 지금은 3, 4쯤으로 내려앉았다는 것.
처음 갈등의 발단은 경제적 문제였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도산 직전까지 몰리면서 몇 달치 월급이 묶이고 보너스는 구경조차 못했다. 잘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지만 아내는 달랐다. 처음 얼마 동안은 함께 걱정하며 위로도 했지만 조만간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
가뜩이나 어깨가 축 쳐진 가장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지는 못할 망정 하루가 머다하고 잔소리를 해대는 아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경제 문제는 시댁과의 갈등으로 비화됐다.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시댁에 무슨 돈을 드리냐?"는 아내의 말. 남편은 "우리가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어른 용돈은 꼬박꼬박 드리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 잔소리가 듣기 싫어 야근과 회식을 핑계로 매일 늦는 남편에게 아내는 다시 포화를 집중했다. 매일 패트리어트와 스커드가 난무했다. 류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배우는 기간이 바로 결혼 10년차입니다. 아울러 포기와 관용을 배우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미사일도 다 떨어졌습니다."
◇ 나 혼자 악 쓰며 살아온 세월
전업주부 조모(36) 씨는 "지난 10년을 두 번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고 단언했다. 기대에 부푼 신혼 생활이 시작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180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젠틀맨'의 표상이던 남편은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돼 버렸다. "밖에서 돈 벌어오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는 말은 남편의 모토가 됐다. 툭하면 접대, 회식을 핑계로 새벽에 귀가하거나 아예 외박을 하는 일도 잦았다.
처음 몇 번은 집안이 떠나갈 것처럼 울며불며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썼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결혼생활이냐며, 돈 많이 안 벌어와도 좋으니까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라고. 하지만 오히려 화를 낼 때마다 "다 처자식 먹여 살리자고 하는 짓인데 여자가 바자기만 긁어대니 일이 안 풀린다."며 오히려 더 화를 냈다. 시어른도 결국 핏줄 편을 들었다. 처음 몇 번 며느리 편을 들어주더니 결국에는 "너무 바가지 긁지말아라. 돈 버느라 얼마나 힘들겠냐?"고 남편 손을 들어주었다. 연년생인 두 아들은 벌써 초등학생이 됐다. "남편은 아이가 몇 반인지, 친구 이름은 뭔지도 모릅니다. 저와 아이가 원하는 건 돈 버는 기계가 아니라 남편이자 아빠인데…."
◇ 당신은 나를 '너무 몰라'
직장 생활을 하는 주부 박모(39) 씨는 "남편에게 미안하면서 아울러 야속했던 시간"이라고 했다. 남편은 회사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가정에서도 먼저 가사일을 도와주는 '으뜸 남편'이었다. 하지만 박 씨는 늘 외로웠다. 남편은 늘 아내를 가르치려 들고, 자기 세상의 바깥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박 씨가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온 어느 날, 남편 품에라도 안겨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었지만 남편은 오히려 매정하게 박 씨를 앉혀세워놓고 "일을 똑바로 했으면 왜 스트레스 받느냐?"며 면박을 줬다. 잘못을 따지자는게 아니라 그저 힘들다고 어리광 부리고 싶을 뿐인데도, 남편은 "너 정도면 행복한 줄 알아야지. 남들은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만 살잖아."라며 말을 끊어버렸다. 그런 남편이 너무 야속해서 채팅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친구처럼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았다.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몇 번인가 남편을 속이고 만나기도 했지만 진전된 관계를 요구하는 남자에게 놀라서 그마저 그만두고 말았다. "아내가, 여자가 투정을 부릴 때는 그저 편만 들어주면 됩니다. 남자들은 그 간단한 비밀을 모르더군요."
◇ 포기는 이혼보다 더 무서운 결론
기업체 팀장인 최모(42) 씨는 "몇 번이고 포기하려다가 다시 신혼으로 돌아가는데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바깥 활동이 많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최 씨는 주말에도 집에 붙어있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특히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 다니기를 좋아했던 그는 결혼 후 몇 차례 아내와 함께 낚시를 갔다가 부부 싸움만 하고는 돌아오는 경우가 반복됐다. 취미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거부하는 남편. 사소한 취미생활 문제로 불거진 갈등은 점차 작은 부분까지 확대됐고,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치사할 정도로 사소한 일까지 걸고 넘어지면서 부부 사이는 극과 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내려진 결론은 서로 포기하자는 것.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자는 말이 오갔고 일년 넘게 부부관계도 없는 냉랭한 전선이 집안에 흘렀다. 문제는 부부 간에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치원생이던 아들에게 소아 우울증 증세가 보인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부부는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다. 아내가 싫어하는 낚시 대신 가족이 함께 하는 등산을 가기로 했다. 아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부부간 대화도 많아졌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초등학생 아들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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