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이정의 독서일기]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사람이 사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이다. 그래야 사람다움을 제대로 실천하며 사람의 세상을 조화롭게 꽃피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인문학은 사람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주고 삶의 방향성에 대한 감각을 단련시켜 준다. '인문학의 위기'는 그래서 '인간의 위기'이며 '삶의 위기'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오래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하며 인문학의 '부활'을 위해 고심해 왔지만, 비틀거리다 쓰러진 인문학은 이제 숨쉬는 기미조차 들리지 않는다.

제일 교포 2세인 서경식 교수가 노마필드, 카토 슈이치 교수의 강연과 대담을 모아서 엮은 이 책은 '우리 시대에 인문 교양은 왜 필요한가?'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일본도 우리 사회만큼이나 '인문 교양'이 고사(枯死)할 지경에 놓인 모양이다. 하긴 '인문학의 위기'는 세계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교양교육의 실패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라는 서경식 교수의 다소 '도발적인 발언'도 어쩌면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인문학, 혹은 '인문 교양'이 왜 필요한가? 카토 교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이기 위해서는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성숙의 과정이 필수일 것이다. 인문학이 융성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효용성 즉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기능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취직에 유리하려고,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해서'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체성도 자율성도 상실한 '노예화' '기계화'된 인간만 양성한다. 경쟁에서 패자로 전락하고 싶지 않으면 재빨리 자신을 효율적인 기계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죽어버린 대학을 과연 대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실용적인 교육은 삶의 수단과 방법이 되기는 하지만 삶의 방향과 목적을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카토 교수는 이것을 자동차에 비유한다. "자동차가 연비가 높고 효율적으로 달리고 스피드가 있다는 것은 테크놀로지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떠날지 목적지를 결정하는 것이 교양이다"라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어디로 가야 좋을지 방향을 모르면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운전사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유인'이고 싶지만, 개인이 자신의 정신적 자유와 양심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세상이란 '무지막지'하게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취약하다. 그래서 이 책은 말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즉 자신의 안을 보는 눈도 중요하지만 밖을 보는 눈도 동시에 중요하다는 것. 삶과 앎, 현실과 정신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사람은 현실에 휘둘리는 나약하고 타율적인 존재로 추락하기 쉽다.

'실용성'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처세의 테크닉과 식민주의적 정신만을 고양한 인간에게 '인문 정신'이란 참으로 하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의미? 이런 말은 이제 그들에게는 외계의 언어일 뿐이다. '존재의 확장'보다 '소유의 확장'이 더 중요해진 사회에서 인문학, 아니 인간이 설자리는 없다. '경제난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힘이 세상을 휩쓸고 다니고, '돈'이라는 구심점으로 몰려드는 맹목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삶의 물결에서 '인간'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감수성, 인간의 느낌을 상실한 인간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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