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또 한 해의 가을이…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이 자꾸만 앞쪽으로 기울어져서 읽던 책을 덮치기 일쑤인 일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안정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도리어 이제는 슬쩍 뒤로 물러나 앉아 "너는 그동안 뭐했니?" 하며 나를 쳐다보는 듯해서 급기야는 좀 비겁하게 고개를 돌리고 오늘이 며칠인가를 문득 생각했다.

지난 금요일 고등학교 1학년인 막내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갑자기 팔공산 갓바위로 등산을 가고 싶다고 해서 우리 세 식구는 간단하게 배낭을 꾸려 야간 산행을 해보기로 했다. 방금 산문을 빠져나온 한 차례의 등산객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밤바람을 피해 재빨리 숲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버지와 아들의 힘찬 발걸음이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나만을 넌지시 비춰주는 희미한 불빛의 감동으로 나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뒤늦게나마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 열두 시가 가까워진 시간에도 기도하는 참배객들로 가득 찬 그곳에서 나는 맨 뒷줄에 앉아 아버지와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아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숙연하게 앉아 있었을까? 어쩌면 분위기에 눌려서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 나와 마주친 맑고 투명한 아들의 눈빛 속에서 앞으로 더욱 진지한 삶을 엮어 갈 바른 자세를 기쁘게 읽었다면 엄마의 기대치가 너무 앞선 것일까? 아무튼 삭풍이 오기 전에,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아들과 함께 새롭고 신선한 야간산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적잖은 기쁨이 되었다.

요사이 가족끼리도 서로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츰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한 달에 한번 혹은 두 달에 한번이 되더라도 이렇게 서로의 시간을 조율해서 함께 움직여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시점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그러나 1년이란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고 얼마나 열심히 고민하고 애썼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특히 대입 수능시험이 이 계절에 치러지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수험생을 돌보는 학부모의 마음이 지금 어떠하리라는 것은 미처 경험을 해 보지 않았던 이들도 넉넉히 짐작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번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결과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 그 결과의 내용에 오래도록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부족한 것은 다시 채워 가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고, 새롭게 방향을 수정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언제나 준비된 자의 편에서 결실의 기쁨을 선사하는 계절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나눠주는 선물은 땀 흘리고 수고한 만큼의 무게로 각자의 품에 돌아온다.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 남은 달력 한 장과 이미 일주일을 보내버린 11월의 나머지 날들로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 해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하루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가을은 저녁노을이 지는 때와 매우 흡사해서 할 일을 다 하고 난 뒤의 안도감으로 더욱 깊고 편안한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는 좁혀서 내 자신을 생각해 본다. 시인으로 등단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더욱 창작에 몰두해서 내년쯤이나 늦어도 그 다음 해쯤에는 첫 시집을 펴낼 것을 저물어가는 이 가을에 나 자신과 굳게 약속한다. 내 영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한 권의 시집은 그간의 내 삶의 중간 결산이자 새로운 도약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 시간 부풀어 오르는 기대와 설렘을 가누기가 어렵다.

차츰 엷어지는 햇살 속에서 이제 막 수확을 끝낸 넓디넓은 들판을 바라본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그다지 넓지 않은 여백이라도 몇 평쯤 거느리고, 하물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건강하게 뿌리 내릴 수 있는 마음의 텃밭을 일구어 나갈 것이다.

김미정(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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