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이 중심이 된 혁신정당인 진보당이 1956년 11월 10일 창당했다. 진보당은 혁신세력 내 여러 정파의 포용에는 실패했다. 또한, 조봉암의 공산당 경력을 의식하여 남로당 계열의 가입을 억제하기도 했다. 진보당의 출범은 순탄하지 못해 지방 결성대회와 지구당 결당대회는 반공청년을 자칭하는 괴청년들의 습격과 방해를 받기도 했다.
조봉암은 대통령선거에서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79만 7천여 표,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만 3천여 표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이승만과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하에 19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들이 경찰에 검거되고, 조봉암마저 검찰에 의해 기소되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다.
진보당의 정강정책 중 '평화통일론'과 그 구체적 방안으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이 북한이 주장하는 '중립국 감시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과 같다는 혐의로 창당 15개월 만에 정부에 의하여 1958년 2월 25일 등록이 취소되고, 조봉암은 이후 사형에 처해진다.
조봉암의 가장 큰 실책으로 대구의 보수 혁신계인 서상일과 결별을 꼽는다. 당시"죽산이 동암의 갓을 썼더라면 이승만이 진보당 사건의 꼬투리를 잡지 못했을 텐데…."라고 한탄 섞인 말이 전해진다.
▶ 1939년 일제, 창시개명제 공포 ▶ 2000년 서해대교 개통
정보관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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