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대구 중구 계산동 2가 M주상복합아파트 뒤쪽에 있는 이상화 고택에서는 세월의 허물을 벗겨내기 위해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시커멓게 때가 묻었던 벽면은 하얀 회칠로 새단장되고 허물어졌던 처마는 바짝 고개를 들었다. 본채 툇마루 칸마다 미세기(두 짝을 한 편으로 밀어 겹쳐지게 여닫는 문이나 창문)가 달리고, 아래쪽 고막이(온돌 구조에서, 토대나 하인방의 아래 또는 마루 밑의 터진 곳 따위를 돌과 흙으로 쌓은 곳)는 하늘색 타일로 옷을 갈아입었다. 본채 앞 작은 정원은 석류와 장미로 꾸며졌다.
마주앉은 서상돈 고택도 마찬가지. 널찍한 마당에는 붉은 흙이 질퍽하게 깔렸고 안채와 별채, 사랑채의 팔작기와가 옛 감각을 되찾았다. 복원 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 고택은 소공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두 고택과 불과 10m 정도 떨어진 이상정·박기돈 고택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상화 시인의 맏형이자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이상정의 생가 지붕은 계산문화관과 맞닿은 채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고, 집 안팎을 구분해주는 건 낮은 회색빛 철제 담장이 전부였다. 문을 열자 마당은 어수선했고 사랑채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이상정 고택과 맞닿은 박기돈 고택도 사정은 비슷했다. 박기돈은 대구상업회의소 초대회장으로, 일제강점기 때 서예 대가. 숯불갈비 식당으로 이용됐던 고택은 세를 놓는다는 안내문만 붙어있었다. 집은 오랫동안 비워둔 탓인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겼다.
대구 도심의 대표적인 고택인 이상화·서상돈 고택의 복원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도심 속에 흩어져 있는 다른 고택에 대한 복원과 보존 사업도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근대문화의 중심지여서 보존가치가 높지만 보존은커녕, 현황 파악조차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구 도심의 고택 가운데 근대 건축물로서 가치를 지닌 고택은 100여 채. 이 가운데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거나 향토사적으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고택만 20여 채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상화·서상돈 고택을 제외하면 보존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민족지사이자 이상화 시인의 백부였던 소남 이일우 고택과 이상화 시인 생가, '봄은 고양이로다'를 지은 시인 이장희 고택 등은 중구 서성로와 남일동 일대에 흩어져 아직 보존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또 소설가 현진건과 월북화가 이쾌대의 생가 등은 정확한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고택들도 재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고택이 많은 서성로와 북성로 일대는 도시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개발 논리 앞에 보존 대책은 세우지도 못하고 있고, 대구시도 아직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 고택을 매입한 뒤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보존 수단이지만 사업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 실제로 이상정·박기돈 고택의 경우 시가 매입을 추진했지만 매입가를 두고 건물주와 입장차가 커 추진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시 관계자는 "고택 관리와 관련해 현황 파악이 시급하다."며 "이상화·서상돈 고택을 근대문화공간 디자인 개선 시범사업으로 일단 추진하는 한편, 다른 고택들도 도심 관광자원 개발의 일환으로 관리 대책을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우선 고택 보존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시민 인식 전환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시형 한옥 이용 우수사례'를 선정해 홍보하거나 고택 수리비 일부를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권상구 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도심 속 한옥은 생활공간보다는 식당이나 찻집 등 박제화되고 상업적인 가치만 커진 것이 사실"이라며 "'한옥스테이' 등 건강하고 가치중심적인 우수 사례를 발굴, 지원함으로써 한옥에 대한 긍정적이고 새로운 인식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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