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저녁놀을 바라보는 감천마을의 선비-오일도

주실마을에서 2차선 도로를 따라 영양읍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감천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감천마을은 오일도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일반인보다는 시인들에게 더 유명한 오일도는 24세 때 등단하여 1935년 사재를 털어가며 순수 시문학지 《시원》을 창간한 사람이다. 조지훈처럼 대중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애상적이며 동양적인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여 기교를 탐내지 않는 소박한 시풍으로 청춘의 번뇌와 시대의 우수를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감천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도로 건너편 하천절벽에는 천연기념물 제114호인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어 좋은 경관을 이룬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마을 입구 하천 언덕 위의 작은 공원에 있는 오일도 시비를 먼저 찾기로 했다. 소공원이라고 하지만 다른 건물은 전혀 없고 단지 시비만 외로이 세워져 있어 오히려 답사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시비에는 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학생들과 함께 을 차분히 읽었다.

작은 방 안에 /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 또 무엇이랴 /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 붉은 꽃밭 속으로 / 붉은 꿈나라로(오일도, 전문)

장미를 피우려다 피우지 못하고 저녁놀을 타고 가는 시인의 모습이 슬프게 그려진다. 그래도 시인은 저녁놀이 만든 붉은 꿈나라로 가고 싶었을 게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그 이면에는 항상 아픈 현실이 존재한다. 그래서 시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감천마을은 의외로 넓다. 조지훈의 주실마을과는 달리 마을 어디에도 오일도에 대한 안내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입구에서 마을 사람에게 물어 오일도 생가를 찾았다. 좁은 골목길에는 접시꽃이 활짝 피었다. 담장을 넘어 줄기를 펼친 호박넝쿨에도 작은 애호박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대로 고향의 풍경이다. 오일도의 생가는 감천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생가는 44칸짜리 건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오래된 건물을 전혀 보수하지 않아 어딘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올라선 지붕은 여전히 위엄이 있었지만 마루 아래 댓돌은 이미 회색빛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옛날의 정취를 무색하게 한다. 감천마을은 낙안 오씨의 집성촌이다. 지금 오일도 생가에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50이 넘으신 아주머니의 집안 사랑도 유별나다. 과장되지 않은 소박한 시골 아주머니의 모습으로 따뜻하게 다가왔다. 멀리서 찾아온 방문객에게 약간의 수줍음까지 보이시면서도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으셨다. 오일도 시인이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지사이자 항일 시인임을 자랑하셨다. 조지훈의 형인 조동진의 유고시집을 발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황량함이 주조를 이루는 오일도의 시에는 민족의 얼과 정과 한이 스며들어 있다. "한낮에도 광명(光明)을 등진 반역(反逆)의 슬픈 유족(遺族), 오오 올빼미여! 자유(自由)는 이 땅에서 빼앗긴 지 오래였나니"(오일도, 부분) 하며 식민지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한탄했다. 식민지 말기 문인 대부분이 변절을 하는 가운데서도 올곧은 절개를 지킨 오일도. 알고 보면 우리는 그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이 아닐까? 감천마을을 돌아 나오는 발길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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