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구 매천로에 승용차를 올려 왜관 방면으로 달린지 10여 분. 대구영어마을은 칠곡군 지천면의 한적한 농촌 마을 안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시작되는 고갯마루를 다시 5분여 달려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이윽고 영어마을이 전경을 드러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입지였다. 유럽풍의 건물 4개 동이 모인 영어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로 들어서자 가방을 메고 걷던 외국인 강사가 '굿 애프터 눈' 하며 인사를 건넨다. 기자도 저절로 영어 인사가 튀어나왔다. 얼떨떨한 사이 금발머리의 한 외국인 여강사가 "Keep the line!(줄 서!)"을 외치며 한 무리의 학생들을 인솔하며 지나쳐 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영어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흡사 외국에 온 듯했다. 지난 6일 대구·경북 초등학생 200명을 초청한 2박3일(5~7일) 무료 캠프가 한창인 대구영어마을은 그렇게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대구 영어 마을 체험기
"Where are you flying to?", "New York."
'상황체험동'이라고 적힌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이 원어민 강사에게 차례차례 다가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모의 출국장. '짐은 몇 개나 있느냐', '좌석은 창가 쪽으로 할 것인가, 통로로 할 것인가', 항공사 직원으로 꾸민 강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학생들 손에는 모의 여권과 항공권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실제 80석짜리 소형 항공기를 교육용으로 꾸민 비행 체험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이들 입이 귀에 걸렸다. 항공기 이륙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여승무원(원어민 강사)이 비상시 안전수칙을 일러준다. 박동산(대구복현초교 6년·12) 군은 "정말 외국 여행을 나온 기분"이라며 "이제 외국 여행도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기내식(사탕)을 나눠주던 강사 케빈 케스터 씨는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의 열의가 대단하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려면 액티비티(activity) 위주의 수업이 최고"라고 말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호텔 체크인 중인 학생들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법했지만 호텔 직원 역을 맡은 원어민 강사는 매번 "Do you make a reservation?(예약했습니까)"라고 진지하게 연기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체험동 지하로 내려갔다. 본관 건물을 제외한 상황체험동, 기숙사동, 창의동 등 대구영어마을의 3개 동은 지하통로로 연결돼 있다. 대부분의 체험 수업은 이곳에서 진행된다. 우체국, 병원, 경찰서, 상점, 애견센터 등 17개 체험실이 중앙 홀을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돼 있었다. 창의동 지하에는 뉴욕 42번가를 재현한 거리 풍경이 제법 볼 만했다.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지긋해 보이는 경찰 복장의 원어민 강사가 활발한 몸짓으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32년간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실베스터 올리버 씨는 "학생들이 미리 받은 영어 단어 퍼즐을 풀어보면서 자연스럽게 길 안내에 필요한 표현을 익히게 하고 있다."고 했다.
1층 실내 체육관에서는 체육 수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필리핀 보조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율동을 따라하는 모습에는 신기함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최민영(의성초교 5년·11) 양은 "입소 첫 날인 어젯밤에는 원어민 선생님, 친구들과 재미있게 보드게임을 했다."며 "점심 때 먹은 햄버거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이번 3일간 체험한 수업은 대략 10여 개. 모든 수업이 철저하게 체험과 말하기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구영어마을의 과제
대구영어마을은 학부모·학생들의 큰 관심 속에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려 섞인 시선도 적지 않다. 영어마을 붐을 주도했던 경기도 파주영어마을이 지난해 150여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영어마을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민간(영진전문대)주도로 운영되는 대구영어마을로서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적자가 난다고 해서 지자체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적절한 수익구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용자 확보가 최대 관건이다. 대구영어마을 측은 이와 관련 "학교 단위의 캠프 입소를 가장 바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대구시 교육청과 계속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4박5일 프로그램 경우 연 32회, 6천400여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다음이 적정한 비용 수준. 지자체 도움 없이 정상 운영을 하려면 비용 현실화가 전제돼야 하지만 침체된 지역 경기를 고려하면 수준 결정이 쉽지 않다. 현재 대구시가 경비 보조를 해주는 4박5일 입소 프로그램 경우 학생 1인당 16만 원. 그러나 이번 겨울방학 동안 계획중인 4주짜리 캠프는 150만~200만 원대에 이른다는 게 영어마을 측의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어뮤즈먼트(Amusement)의 부족이다. 파주 영어마을이 초반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가 워낙 넓고 볼거리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구영어마을은 파주 식의 '영어테마파크'와는 거리가 멀다. 부지가 작고 수업이 이뤄지는 건물 이외에는 구경거리도 별로 없다. 파주처럼 유원지 삼아서라도 방문하는 사람들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대구영어마을 측은 "이런 상황 때문에 더욱 프로그램 내용과 질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며 "대구영어마을은 어뮤즈먼트보다는 영어교육 본연의 기능을 위한 체험공간으로 꾸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