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이란 한 쪽은 신바람이 나고, 다른 쪽은 혼쭐이 나는 것이다."라던 어느 객쩍은 친구 녀석의 오래된 농담을 떠올려 본다. 나에게도 딱 그런 얄궂은 '신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군복무를 대신해, 무의촌 지역에 공중보건의사로 갓 근무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칠순을 넘긴 할머니가 관절통을 호소하면서 보건지소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임상 경험이야 있을 턱이 만무하고, 고작 아는 거라고는 의학교과서의 구절들뿐이라. '진찰에 있어서 문진의 기본은 성급하게 예단하지 말고 환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라는 지당하신 말씀에 따라, 첫 질문을 시작했다. "혹시 그 전에 어디 다치신 적은 없었습니까?" 갑자기 할머니 얼굴이 환해지고 눈까지 반짝거리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구구절절이 사연을 늘어놓으신다. 소싯적 힘에 겨운 빨랫감을 지고 가다가 넘어진 일부터, 피란길에 소달구지에 치여 발목을 접질리고, 논일 밭일 하느라 허리 휘어지고, 철없는 영감님 말리다가 엉덩방아 찧은 일까지.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인생 파노라마에, 할머니는 제 풀에 취해 울다가 웃다가 새삼 '신바람'이 났다. 신출내기 의사는 제 말에 제 발등을 찍혀서 그냥 속수무책으로 '혼쭐'만 나고 있었다. 진료차트에다 벌써 알량한 진통소염제 몇 알에다 위장약까지 처방은 진작 마쳤고, 그날따라 핑계를 삼을 만한 다음 환자도 없어서 진땀나는 '신혼'의 진풍경은 좋이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참 장한 의사라며, 연방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나가시는 할머니를 그냥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볼 수밖에는. 그 후 눈치껏 할머니의 장황설을 막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나는 본의 아니게 요즘 보기 드문 심지가 굳고 친절한 젊은 의사라는 오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도 환하게 피어나던 그 할머니의 영문 모를 웃음을 가끔씩 떠올려 본다. 정작 요긴한 증상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 두고서, 몇 군데의 병원과 약국을 전전하면서 겪었던 고생담 따위나 잔뜩 늘어놓는 아줌마의 말허리를 냉큼 자르는 내 모습을 보면서. 혹은 밤새 보챈 아기를 다시 안고 와서 울상 짓고 있는 엄마에게 사전에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았냐며, 도리어 역정을 내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반평생을 함께해 온 관절통과 위장병을 단숨에 떨쳐버릴 수 있다는 헛된 소망이나 신통력을 그 신출내기 의사에게서 구했던 것은 결코 아니리라. 다만 '퇴행성관절염과 만성위염'이라는 딱딱한 병명으로만 내치지 않고서,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당신의 힘겨움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졌으리라.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온 그 아주머니나 짧은 밤을 무척이나 길게 새웠을 아기 엄마가 원했던 것 또한 무슨 특별한 비방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내 힘겨움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걱정을 함께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이 아닐까 싶다. 짓궂은 그 친구의 농담에 뒤늦으나마 철이 든 대거리를 건네주고 싶다. "신혼이란 제각각 신나고 혼나는 것일지언정, 결혼이란 서로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주고받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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