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울고 있었다.
성지 시리즈를 하면서, 늘 마음속에 남아있던 원각사지를 찾은 것은 지난 6일 오후였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의 맨 안쪽에 위치한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유리 보호각에 둘러싸여, 불멸의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열반의 집이라는 느낌은 오간 데 없고, 답답하였다. 거대한 유리 보호각에 사방에서 비치는 나무 그림자 때문에 열반의 길로 들어선 부처님의 영원한 삶이 베어 있는 석탑이라는 느낌 대신, 오만 번뇌에 사로잡혔다. 번뇌도, 정열도, 사랑도 남김없이 태워서 모든 불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의 집,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처음 대하면서 그런 번뇌에 사로잡힌 건 순전히 인간들 때문이었다. 인간의 단견이 600년 세월을 버텨온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유폐 아닌 유폐로 몰아넣은 것이다. 물론 산성비와 새똥 등 각종 오염으로부터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났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 보호각 반사가 불법의 세계 느낄 수 없게 해
서울 취재길에 조계사와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같이 취재하려고 마음먹을 때만 해도 기분 좋았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지에 세조가 세운 국가수호 사찰 원각사는 비록 폐사되고 없지만, 월인천강석보를 썼던 세조가 즐겨 나들이했던 원각사를 지켰던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보면 스스로 등불을 들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노인들이 주로 찾는 탑골공원, 구(舊)원각사지 옛터의 한 귀퉁이에 갇혀,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었다. 좀더 오래, 좀더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하기 위해 취한 조처가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참맛을 다 앗아가버렸다. 문화재 보존처리의 잘못된 사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약한 재질인 대리석 탑인데다 산성비와 비둘기의 배설물 등으로 훼손이 가속화되어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그래서 서울시가 수년 전 유리 보호각으로 탑을 통째로 덮어버린 것이다. 높이가 무려 12m에 이르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유리각의 반사가 심해서, 아래서 쳐다보면 탑신만 보이고, 세부 조각에 새겨진 불법의 세계를 즐길 수 없다. 이 석탑의 150여 면에는 불, 보살, 인물, 용, 사자, 말, 사슴, 연꽃 등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현장에서 그를 볼 수 없다면 애석한 일이다. 눈높이에서 보이는 기단부는 그나마 볼 수 있지만, 상층 탑신부로 올라가면 나무 그림자가 유리에 비쳐서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조각인지, 나무 그림자인지 헷갈린다.
◈ 문화재 보존처리는 최소한만 하는 게 원칙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비슷한 대리석재로 만들어진 파르테논 신전 역시 산성비와 새똥으로 인한 부식이 우려되지만 거기를 통째로 막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고 있다. 보호각을 세우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세워야 옳았지 않나 싶다. 예를 들면 라스베이거스의 다운타운에 있는 전자쇼장처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은 높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하늘을 전자판으로 덮고, 그 전자판은 스크린이 되어서 밤마다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같은 화려한 전자쇼가 열려 관광객들을 그러모은다. 원각사지 10층 석탑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숨도 쉬지 못하게 (물론 유리벽 사이와 천장 등에 환기처리는 해놓았다) 옥죄일 것이 아니라, 10층 석탑 위에 경관을 해치지 않는 규모로 지붕을 만들어서 우선 산성비를 막아주고, 새똥 등은 한 번씩 청소해주는 방식을 택하는 게 좋았지 않나 싶다.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에도 매일 조각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껌을 떼내는 사람이 배치되어 있기에 그렇게 깨끗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지금이라도 탑의 숨통을 막고 있는 유리 보호각을 철거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재에 손을 대는 보수 및 수리는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고, 원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물론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보존처리는 원형에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그 원형을 제대로 보고 감상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현실로 인해 난센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영광과 수난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 연등회 열린 조선시대 세조의 원찰
원각사 창건주는 세조이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명을 받아 '월인석보'를 지었고, 그것의 요점만 간추려서 가곡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면서 인간적으로 몹쓸 짓을 많이 저지른 세조는 왕좌에 오른 뒤,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진흥정책을 폈다. 등극한 지 10년 만인 1464년 5월 12일에는 원각사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원각사 10층 석탑은 건립되지 않았고, 3년 뒤인 1467년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 연등회를 열었다고 '세조실록'에 적혀 있다. 원각사 10층 석탑은 고려석탑 경천사 10층 석탑(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을 모방하여 만든 닮은꼴 탑이다. 원형을 찾을 길은 없지만, 당시 원각사는 법당인 대명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선방, 오른쪽에 운집당, 뒤쪽에 해장전이 있었고, 절 입구에는 해탈문 반야문 적광문의 3문이 있었다. 나라의 원찰이었던 만큼 법당은 청기와를 이고, 금칠단장으로 장엄하였다. 해장전에는 대장경이 봉안되었으며, 법당 동쪽에 연지가 있고, 서쪽에 동산을 만들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나 절은 세워진 지 40년 만에 나라에서 향공양을 올리던 영광의 자리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연산군이 원각사에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으로 만들어버렸나 하면, 1514년에는 폐사시켰다. 당시 동 3만㎏(5만 근)으로 만든 원각사 대종은 숭례문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데 쓰였다가, 1594년 다시 종각으로 옮겨졌다.
◈ 훼손된 탑신, 430여 년 만에 원형 되찾아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연산군에 의해 훼손된 지 430여 년 만에 미군 공병대에 의해 복원된 안타까운 사연도 서려 있다. 원각사를 없애버린 연산군이 창덕궁에서 한양 도심을 바라보니, 원각사는 폐사되었는데, 석탑만 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당시 한양 중심에 우뚝 솟아있던 건축물 가운데, 원각사 10층 석탑이 가장 드러나는 조형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상층부 탑신을 내리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탑신 3층이 강제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졌다. 해방된 다음해, 미군 공병대가 기중기를 이용하여 원상태로 복원하여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마치 가우디의 조각품처럼 돌을 떡 주무르듯이 그렇게 유연하게 만진 걸작품이다. 기단과 탑신의 크고 작은 면마다 도상이 새겨져 있는데, 유리벽 너머로 보니 기단 2층에는 의관을 갖춘 사람, 말을 끄는 자, 칠보탑에 절하는 사람 등 인물이 새겨져 있고,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등이 나오는 서유기가 새겨져 있다. 바로 불법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지금 원각사터에 들어선 탑골공원에 가면, 정문인 삼일문 오른편으로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 보물 제3호)가 서 있다. 돌거북 위에 거대한 비신으로 되어 있는데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예전에는 어린아이들이 올라가서 타고 놀기도 하였던 사진이 남아있다. 비각을 세워서 비는 보호가 되는데, 전모를 느끼기에는 충분치 않다.
혹시 해가 떨어지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호각에 나무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원형을 볼 수 있을까 기다렸으나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서울의 첫 근대식 공원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으로 뒤바뀐 원각사터 10층 석탑을 둘러보는 취재여행 내내 발길이 무겁다.
글·사진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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