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를 나뒹구는 노란 은행나무 잎들에서 쓸쓸함이 묻어나고 낙엽 떨어진 공원 벤치에 홀로 앉은 여인의 버버리 옷깃 위로 연민이 깔리는 이 즈음, 늦가을의 서정성을 달래볼까 찾아 나선 미술관 가는 길이었다.
야트막한 산자락마다는 울긋불긋한 단풍의 점묘법 채색이 한창이다. 추수가 끝나 한가로운 시골 동구 밖 길섶에서 태우는 매캐한 낙엽냄새에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향이 그리워진다.
동산을 배경삼아, 연못을 정원 삼아 가을 빛 완연한 곳에 자리한 미술관엔 가을을 소재로 한 볼거리가 소복했다.
'섬'과 '사유의 숲'을 제목으로 한 야외 조형물과 새의 형상을 본 딴 모빌, 그리움을 연상시키는 조각돌은 계절의 감성을 만끽하기에 모자람이 없고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미술관 뜰 앞은 만추(晩秋)의 축소판이 된다.
시간에 묻어온 낙엽들 사이로 낯익은 소리들이 가슴에 젖어들고 연못 속에 거꾸로 비친 아담한 미술관은 가을이 그려내는 데칼코마니 작품을 닮았다.
양지 바른 미술관에 딸린 작은 카페에서 마셨던 뜨거운 커피 한 잔.
가을이 깊어간다.
카페 창 밖 너머로는 소슬바람에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다. 새삼 가을 속 시간이 참 야속해진다.
단풍 빛깔이 곱게 물든 동산에서 내려다보는 미술관 전경은 아름다웠다. 가을 산색이 싱그러운 볕 좋은 곳에 있는 하얀 미술관 풍경은 정겨웠다. 발밑에서 밟히는 낙엽소리에 문득 깊어가는 미술관 뜰, 엎드린 여인의 나상(裸像)은 차라리 애처로웠다. 연못을 돌아들어 찾은 미술관의 유화그림들은 어느 순간 스쳐왔음직한 새벽의 정경을 되살려 놓았다.
이즈음 대구 인근 미술관은 사무치는 늦가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진 주변이 계절의 정취를 물씬 풍기거니와 전시공간에서 만나는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짙어가는 계절의 서정성에 흠씬 빠져본다.
▨시안미술관
폐교를 리모델링했으나 얼핏 보아선 눈치 채기 어렵다. 운동장에 잔디를 깔고 공간 미학에 맞춰 설치미술품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 들면 먼저 시야가 탁 트인다. 시선이 멈추는 지점, 작은 동산에는 가을빛이 완연하다. 노란 은행나무와 붉은 단풍나무, 연두색 대나무 잎들의 조화가 한 폭의 유화 같다.
잔디 뜰에는 '섬', '희망의 바람', '기다림', '사유의 숲' 등 설치작품이 전시돼 있어 자유롭게 둘러 볼 수 있다.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듯 미술관 뜰을 거닐면 여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3층 건물의 본관 미술관은 층을 따라 3개 전시관이 있다. 현재 '민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1층엔 대형 미디어 설치작품인 '십장생'이 설치돼 있고 2,3층엔 현대와 전통 민화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문인화나 풍속화와 달리 민화는 복을 기원하고 오래 살기를 염원한 민중들이 그렸던 민화는 자연이나 동물을 빗대 표현하고 색깔도 화려하고 묘사도 상세하고 직설적인 것이 특징. 시간을 뛰어넘어 해학과 풍자, 놀라운 상상력이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만추의 서정성을 어루만져준다.
미술관 뒤 최근에 개관한 문화예술교육센터에는 향토작가 이목을 초대전이 '향수'란 테마로 전시되고 있다. 사과, 대추, 감 등 전원의 일상에서 친숙한 소재를 나무판에 정교하게 묘사한 작품들은 손에 만져질 듯한 사실감으로 와 닿는다.
미술관 2층 작은 카페엔 간단한 식사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안에서 보는 미술관 바깥 풍경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동제 미술관과 대구미술광장
가창 청정 지역 양지바른 곳 폭 꺼진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한 하얀 집 동제 미술관은 가을이 빚어내는 수채화가 파란 하늘과 푸른 가창댐 수면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 멋지다.
최정산이 바라보이는 쉼터에 자리하면 밑에서 올라가고 있는 단풍의 물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쉼터 안에는 미술관 대표인 사진작가 강상규의 사진전이 연중 열리고 있다. 가창의 사계를 두루 즐길 수 있다. 특히 대형 유리창이 난 쉼터 안에서 내다보는 가을 풍경이 정겹다. A, B, C 3개의 작은 전시관에 들러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동제 미술관에서 정대방향 약 2km를 가면 대구미술광장이다.
옛 폐교를 이용한 이 곳은 솟대와 철, 돌을 이용한 야외 조각 작품들이 떨어진 낙엽과 함께 전시돼 있다.
도심과 가까운 거리이면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오붓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주위 산에서 물들어가는 가을의 서정을 맘껏 들이쉬기에 적당하다.
산바람이 불자 쓸리는 낙엽들과 조각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가을이 갖가지 형상으로 다가온다.
▨갤러리 청담
홍련으로 유명한 청도의 유등연지를 돌아 가을 햇살에 빛나는 은빛갈대가 방문객을 맞는 갤러리 청담은 외관이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앞마당엔 지독히 붉게 물든 단풍나무 한 그루가 계절을 대변하고 있다. 그 붉음이 어찌나 강렬한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지난 해 문을 연 이 곳은 입구에 올 연말까지 전시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다. 주로 서양화 전시일정들이다.
갤러리를 찾은 날 서양화가 김성호 전(18일까지)이 열리고 있었다. 새벽과 밤 풍경을 주제로 작품들로 독특하고 기발한 그림들이 신선한 충격과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아하! 이런 장면도 그림이 되는구나.' 뜻밖의 대상을 미적표현으로 구성해 낸 작가의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온통 노란색을 덧칠한 캔버스 위에 가로등 불빛만으로 표현한 새벽도심의 거리모습은 아무리 둔한 감성의 소유자라해도 잠자던 서정성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운 가운데 한 쪽 가장자리에 시골 밤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새어나오는 실내등의 정교한 묘사에서는 시간의 신비한 풍광이 풍겨진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