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윤조의 수다수다] 비상금, 필요해요?

부부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서로가 함께 꾸려가는 경제공동체인 가정. 이 가정을 이끌어가는데 서로 숨기는 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기본이겠지요.

하지만 살다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본 원칙'으로만 돌아가지지는 않습니다. 몰래 딴주머니를 차고 있는 부부들이 생각보다 꽤나 많습니다. '돈 문제 만큼은 철저하게 공유하고 산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 오늘 남편이나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옆구리 살살 간지럽혀가며 슬쩍 한번 물어보세요. 딱 잡아뗀다면 그렇게 믿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요, 혹시라도 말실수를 해 뭔가 찜찜한 '낌새'가 잡힌다고 해도 굳이 들춰낼 것은 없습니다. 부부사이에도 '한없이 투명한 돈 관계'는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비상금'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생각해보세요. 정말 어려울 때 기댈수 있는 샘물 한사발 감춰두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가장 속편할 겁니다.

△아내는 비상금을 꿈꾼다

20여년 전의 일이다. 남편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결혼 10년차의 한 주부가 남편 몰래 처음으로 '비상금'이라는 것을 손에 쥐게 됐다. 생활비를 조금씩 쪼개 적금을 부어왔던 것이 100만원이라는 큰 돈이 된 것이다.

기쁨도 잠시, 그녀는 '이 돈을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이라면 뱃짱 두둑하게 기쁨을 만끽했을테지만, 그때만해도 서릿발같은 남편의 호통소리가 뒷통수에 날아드는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죠."

결국 그녀는 그 돈을 정말 어이없이 '해결'하고 말았다. "불사를 해야하는데 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는 스님께 100만원짜리 수표 한장을 쥐어드린 것이다.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비상금'은 이렇게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지금은 2007년, 강산이 2번이나 변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여전히 부부사이의 이런 '비상금 꼼수'는 난무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비상금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돼 버렸고, 그 액수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다.

우리나라 주부 2명 중 1명은 '비상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 최근 주부커뮤니티사이트 '미즈'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1천126명 중 53%가 '가족 몰래 모아둔 비상금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 규모에 있어서는 1천만원 이상이라는 답이 22%로 가장 많았으며, 100만-199만원(20%), 200만-499만원(18%) 순이었다.

전업주부 이모(47)씨는 7천만원에 달하는 비상금 때문에 끙끙 앓다가 금융회사 직원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발뻗고 잠자리에 들수 있었다. 쥐꼬리만한 생활비를 주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껴써라."고 훈계를 늘어놓는 남편의 잔소리에 진력이 나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할 수 있는 부업은 닥치는대로 안해본 것이 없는 이 씨.

그녀는 이 돈을 아이들 이름으로 차곡차곡 저축해 7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지만 미성년자의 명의로 거액을 예치해 놓을 때는 '증여세가 부과될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으면서 그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작된 것이다. 며칠을 그렇게 고민하다 거래 은행을 찾은 그녀는 '특별한 탈세 혐의가 없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만약 남편이 제가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이혼하자고 난리를 피울 사람이거든요. 돈도 돈이지만, 비상금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일이 있으면 안되잖아요."

△용돈 받아쓰는 남편의 괴로움을 아느냐

용돈 받아쓰는 남자의 생활은 팍팍하다. 후배에게 술 한잔 거나하게 사기 쉽지 않고, 심지어는 담뱃값 한푼에도 쪼잔하게 굴어야 한다. 취미생활에 돈을 쓰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취미생활에 돈이 필요하다'고 아내에게 말을 했다간 "나는 생활비 한푼에도 벌벌 떨며 사는데 너는 쓸데없는데 헛돈을 쓰고 사냐?"며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잔소리를 감당해야 한다.

유모(35)씨는 아내 몰래 카드를 만들어 쓰다가 된통 혼쭐이 났다. 매달 카드내역서가 날아오면 꼼꼼히 훑어보며 "이건 어디서, 누구랑 먹고 마신거야?", "여긴 이름이 좀 수상쩍어. 여자 나오는 술집 아냐?"라고 꼬치꼬치 물어대는 아내때문에 술 한잔 맘껏 마실수 없었던 유 씨는 비자금 계좌를 만들고 비밀 카드를 발급받아 쓰다 아내의 레이더망에 딱 걸려들었다.

"말도 마세요. 카드며 통장이며 다 상납하고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싹싹 빌었죠. 그래도 남자가 비상금 없이 사회생활 하긴 정말 힘들어요. 옷값이며 화장품값에 돈 펑펑 써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남자의 술값은 도저히 용납을 못하는 것이 여자잖아요. 나쁜 일에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일일이 해명하고 허락을 구하는 것도 좀 구차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요. 다시 어디선가 '비상금'을 구해야죠. 이번에는 들키지 않게 현금으로만 결제할겁니다."

최모(37)씨의 연봉이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 그의 아내는 모른다. 회사 경리부에 부탁해 항상 일정액을 뗀 뒤 월급통장으로 송금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잔머리'를 쓰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취미생활 때문이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최 씨. 시간이 남을 때면 카센터에 들러 이것저것 튜닝하고 성능을 업그레이드 하는데 시간을 보내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아내에게 이런 취미를 이야기한다면 팔짝팔짝 뛰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3년 전, 결혼할 때부터 철저하게 '비밀공작'을 펼쳐 아내모르게 월급의 일부를 떼 내 취미생활비로 사용하고 있다. "가끔은 미안하다는 마음도 들지만, 이런 취미도 젊은 한 때 잖아요. 하고싶을 때 원없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상금 감추기 백태

음식물로 가득찬 냉동실에 랩으로 똘똘말은 돈을 감춰놓고, 신발 깔창이나 넥타이 안쪽에 숨기고, 심지어는 휴대전화 배터리 틈 사이에 수표 한 장 고이접어 끼워놓는 '비상금 숨기기의 비법'은 이제 고전이다. 얼마되지 않는 돈에 '혹시나 들통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살아가야 하는데다, 혹시라도 배우자에게 들켰다간 돈 빼앗기고 '배신자'라는 비난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이들을 위해 탄생한 서비스가 있으니 바로 은행들의 '비밀계좌'. '삼성저격수'로 나선 김용철 변호사가 "내 이름을 이용해 삼성이 50억 상당의 차명계좌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이용됐던 것이 바로 비밀계좌다.

비밀계좌는 남들 몰래 계좌주인만이 오직 그 존재를 알고 싶다는 고객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 따라서 인터넷뱅킹이나 폰뱅킹 등으로는 이런 통장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혹시 배우자의 이름으로 계좌 상황을 조회한다 하더라도 들킬 염려가 전혀 없다. 대신 반드시 본인이 은행 창구를 찾아야 거래 내용을 조회하거나 돈을 인출할 수 있다.약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하는 셈이다. 보통예금부터 적금, 펀드까지 대부분의 통장은 숨길 수 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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