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에서 대대로 논밭농사를 지으며 소를 키우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들아, 너는 가업을 이어야 한다."
2남 2녀 중 장남인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저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을 지나온 아버지는 아들의 눈이 먼 데를 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이 때는 누구나 먼 데를 보는 법이다.' 틈만 나면 기타 치고 노래하는 아들. 그런 아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면 괭이과 삽을 들고 논밭으로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장가를 들고 처자식이 생기면 제 놈이 별수 있을 것인가….'
아들의 '뜬 마음'을 붙들기 위해 아버지는 젖소를 사들였다. 한우와 젖소는 다르다. 한우는 잘 먹이고, 외양간을 잘 치우면 된다. 물론 자질구레한 손길이 필요하다. 젖소는 거기에 더해 매일 젖을 짜내고,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위생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자연 일손이 많이 간다.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에 가자 젖소를 팔고 한우를 키웠다.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제대하면 다시 젖소를 키울 요량이었다.
3년 후 군에서 제대한 아들은 농사가 아니라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되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황신욱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 대신 '황무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불렀다. 이제 곧 노인 소리를 들을 아버지는 혀를 찼다.
"군대 갔다오면 철 쪼매 들 줄 알았더니…."
"척박한 대구'경북의 여가문화를 바꿔 보고 싶습니다. 저는 천성이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입니다." 웃음과 레크리에이션이라면 '황무지'에 가까운 대구'경북을 녹색 웃음이 번지는 고장으로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당시까지 레크리에이션'여가 문화라면 대구'경북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아들아, 대구'경북은 치우고 우리 논밭이나 푸르게 가꾸고, 네 눈앞에 마른 소들이나 살찌워라."
"그렇게만 살 수는 없습니다. 노래와 웃음이 저를 부릅니다."
1987년의 일이었다.
아들이 농약 치고 소똥 치우는 일에 몰두해 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은 아들의 줄다리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아들이 아침 일찍 '삐에로 복장'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이제 기타 그만 치고 농사만 짓자."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황신욱이라는 이름의 농부로 남는 대신 무지무지 재미있는 사람, 황무지가 됐다.
사단법인 한국여가 레크리에이션 대구'경북협회 사무국장 황무지(41)씨. 그는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30마리가 넘는 소의 먹이를 주고 똥을 치운다. 3천 여평의 포도밭과 500평의 논농사도 짓는다. 66세인 부친은 오늘도 거르지 않고 말씀하신다.
"이제 농사에만 열중하면 어떻겠느냐? 네가 농사에 열중하면 3천 평이 아니라 3만평 농사를 못 지을 것이며, 30마리가 아니라 300마리 소를 못 키울 것이냐?"
아들은 덩치가 크고 힘도 세니 그만한 농사는 짓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아들을 축산학과로 진학시켰던 아버지였다.
황무지씨는 아버지의 간곡한 바람을 거역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이름으로 두 가지 일을 해낸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 황씨는 경북 경산에서 소 키우고 농사짓는 농사꾼, 황신욱이다. 낮에는 대구와 경북의 중소도시를 오가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레크리에이션 강사, 황무지인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청중을 웃기고 울리고, 춤추고 노래하게 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래서 황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바쁘다. 현대인들 중에는 투잡스(two-jobs) 족이 흔하지만, 황무지씨는 투잡스 족이 아니라 일상인(농부)과 시인(레크리에이션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과 이상, 아버지의 바람과 자신의 이상 사이를 오고가는 것이다.
2002년 전국 노래자랑 연말 결선에 출연해 은상을 받았을 만큼 노래실력을 가진 노래선생이기도 하다. 교회 집사인 그는 교회 행사 때 종교의 본질과 재미를 동시에 살리는 프로그램을 짜는 기획자로도 활약한다. 대구대 평생교육원 강사이고, 요들송 가수…. 크고 작은 각종 행사에 초청돼 MC로 활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매달 1회씩 열리는 청도 각북 '비쓸락 음악회' 무대에 8년째 서고 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매달 1회씩 청송 교도소를 방문해 위문 공연을 펼치고 있고, 8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 서문교회 무료급식행사에 참여해 레크리에이션 봉사를 한다. 사회적 무능력자로 푸대접 받는 사람, 한때의 실수로 범죄자가 돼 버린 사람들일지라도 웃음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바람과 저의 꿈이 늘 대치되지요. 농부가 싫다면 농사관련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셨지요. 그래서 대학 졸업 후 농촌지도소 7급 농림직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어요. 하지만 제 일이 아니었습니다."
황무지씨는 농사나 공무원 생활로 자신을 달래기엔 피가 너무 뜨거웠다. 8일 대구시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구환경대학 총동문회 체육대회장'. 300여명의 남녀 참석자들이 황무지씨의 말과 손짓, 율동을 따라 즐겁게 춤추고 노래했다. 본부석에 자리잡은 점잖은 임원들도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평범한 직장인, 주부들을 술 한 방울의 기운도 빌리지 않고 춤추고, 고함지르게 하는 사람. 그런 끼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 종일 들판에 서 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흙 묻은 목 장갑을 끼고 삽을 어깨에 걸친 황씨의 미소는 천상 농부다. 그러나 웃지 않기로 단단히 작정이라도 한 듯 굳은 얼굴의 청중을 단박에 웃기고 울리는 그의 솜씨는 타고난 연예인이다. 그는 밭에서 느릿느릿 농부의 걸음으로 걸었고, 무대 위에서는 통통통 참새가 튀듯이 걸었다. 밭에서 그는 높낮이 없이 단조롭게 말했지만, 무대에서는 말 한마디에도 리듬을 잃지 않았다. 오랜 경험 탓인지, 적응 탓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어깨에 얹힌 삽과 기타는 구별 없이 잘 어울렸다.
"기타와 노래를 버리고 가업에 충실했다면 지금쯤 커다란 농장을 가졌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랬더라면 웃음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시민 모두가 웃을 때까지, 건전하고 다양한 놀이문화가 우리의 생활이 될 때까지 달려갈 것입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황무지씨는 다시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이제 축사를 둘러볼 시간인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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