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을 흐르는 물은 푸르지 않다. 붉고 노란 색깔이다. 물 위에 드리운 울긋불긋한 단풍을 닮아 계곡의 물도 만추(晩秋)의 빛깔을 머금은 것이다. "후두둑"하고 떨어진 낙엽들은 물을 따라 떠다닌다. 단풍과 계곡은 하나가 돼 울긋불긋한 색의 향연을 펼친다.
가을이면 계곡의 단풍이 너무 붉어 흐르는 물마저 붉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은 가야산 홍류동(紅流洞) 계곡. 진달래와 철쭉이 피는 봄, 하얀 눈이 계곡을 뒤덮는 겨울, 천년 노송이 푸름을 더하는 여름도 좋지만 홍류동의 가을을 단연 백미라 할 수 있다. 단풍으로 계곡의 물빛까지 붉게 물들이는 가을 홍류동은 합천 8경 중 3경으로 꼽힐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가야산 어귀에서 시작한 홍류동 계곡은 해인사 입구까지 약 4km를 흐른다. 10리에 이르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계곡이다. 계곡 양 옆으로 청정한 기운을 뿜어내는 천년 노송들이 위엄있게 자리를 잡고 단풍나무와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한데 어우러져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특히 가을이면 푸른 소나무와 붉고 노란 활엽수들이 보색대비를 이뤄 홍류동의 가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골짜기를 메우고 있는 흰 너럭바위들과 그 사이를 따라 흐르는 맑디맑은 옥류(玉流). 계곡 곳곳을 들썩이며 세차게 흘러내리는 야트막한 폭포와 선녀들의 목욕탕처럼 움푹움푹 패인 소(沼)도 아름답다. 여름이면 금강산 옥류천과 맞먹을 만큼 비경을 자랑한다고 해서 홍류동 계곡을 옥류천이라고도 부른다. 어떤 이들은 홍류동 계곡을 지리산 칠선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한국 4대 계곡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청정한 기운과 상생의 덕을 지닌 가야산의 정기가 녹아 흐르는 홍류동 계곡의 가장 큰 매력은 속진(俗塵)의 때를 씻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가야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숨결을 지닌 홍류동 농산정(籠山亭). 불혹의 나이에 속세를 버리고 가야산에 들어온 최치원은 여기에 머물며 시로 시름을 달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농산이란 정자의 이름을 따온 그의 시에는 속진으로 물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담백한 시선과 청정한 자연에 대한 지고지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사람 말은 지척에도 분간키 어려워라/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 둘러치게 했나(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솔 숲 사이로 흐르는 물이 기암괴석에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나 고와 최치원은 매일 그 물소리를 듣다 그만 자신의 귀가 먹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물소리만 듣고 있던 그가 어느 날 이 홍류동 계곡에 갓과 신발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홀연히 사라졌다는 전설도 있다. 농산정 맞은 편 커다란 바위에는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새긴 글씨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숨결과 정신은 시공을 초월해 홍류동을 찾는 이들을 깊은 감회에 젖게 만든다. 농산정 외에도 축화원, 무릉교, 칠성대, 취적봉, 자필암, 낙화암, 용문폭포 등 홍류동 곳곳이 두루 절경이다.
우리 선인(先人)들은 사람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여겼다. 스산한 가을 바람 속에서 하루하루 만추의 정취를 더해가는 홍류동 계곡. 단풍도 붉고, 물도 붉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붉어지는 삼홍(三紅)의 정취를 선사한다. 나무와 물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 이유로 홍류동 계곡의 단풍은 다른 어느 곳보다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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