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이상범 作 '저물녘 눈발'

저물녘 눈발

이상범

마른 눈발이 혼령인 듯 날고 있다

외양간 여물통의 김과 잠시 몸을 섞는

풀풀풀 어둠을 쪼며 앉을 자리 찾고 있다.

봉창 불빛에 놀라 흠칫 물러서다가도

떡갈나무 울타리의 마른 잎에 살짝 앉아

굴뚝새 숨어든 뒤 울안 눈발소리 듣고 있다.

언뜻 박용래의 '저녁눈'을 연상케 합니다. 한낮의 소란스러움이 웬만큼 가신 저녁과 눈 이미지가 빚어내는 분위기가 그러하지요. '말집 호롱불 밑'과 '변두리 빈터'에 붐비던 눈이 여기서는 '외양간 여물통'과 '봉창 불빛' 가를 떠돕니다.

마른 눈발에 시인의 마음이 실려 있습니다. 눈발이 치는 저녁풍경을 접사하듯 잡아 나가며 무수한 마음의 무늬를 찍습니다. 잠시도 안존하지 못하는 눈발. 연신 어둠을 쪼아 봐도 안온한 정서의 처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봉창 불빛은 한사코 눈발을 밀어내고, 떡갈나무 울타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집니다.

굴뚝새가 뒤 울안에 깃들이듯, 저녁이면 지상의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처소로 돌아옵니다. 하릴없는 떠돎의 끝인지라 좀은 멈칫거리기도 하지만, 끝내는 그 온기에 몸을 섞기 마련이지요. '저물녘 눈발'의 배후에 존재의 귀소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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