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에는 수술하러 미국을 다녀왔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곧 수술실에 설치될 수술로봇을 미리 써 보기 위해 로봇의 제작사가 있는 실리콘밸리엘 다녀왔다. 그런데 이 '로봇'이란 것이 요즘은 어디에서나 화두다. 미래학자들의 예견에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올해 외국영화에서도 가장 큰 흥행을 올린 것이 변신로봇 영화였다. 자동차 생산 등의 산업현장에 조립용 로봇이 등장한 지는 오래됐고 첨단 과학연구에는 나노 로봇이 거론되고 있다. 가정에는 청소용 로봇과 심지어는 애완용 로봇까지 등장하고 있다.
일이 이쯤 되니 병원의 수술실에도 수술로봇(외과로봇)이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수술로봇이라고 하면 보통은 로봇이 스스로 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아마 영화 속의 터미네이터나 가정의 청소 로봇같이 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떠 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수술로봇은 어디까지나 외과의사가 쓰는 하나의 정교한 수술도구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파고들어서 더 섬세하고, 인간의 손가락과 손목 관절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정교한 작업을 해내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전부 외과의사가 조작해야만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로봇수술을 해 보면서 예전의 기억이 가슴 뭉클하게 떠올랐다.
5년 전 겨울, 바로 이 때쯤이었다. '외과로봇'을 연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미국의 한 의과대학 연구소에 연수를 갔다. 연구소에서는 점심때면 커피를 한 잔 타서 들고 햇볕을 쬐기 위해 건물 앞뜰에 나가곤 했는데 그 곳에서는 각기 다른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들을 했다. 하루는 그 대학 동창회 사무실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내게 불쑥 물었다. "넌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뭐하는 사람이야?" 내가 대답했다. "의사, 자세히 말하면 외과의사."(어차피 미국말은 반말이다.) 미국 할머니들은 호기심이 무척 많다. "외과의사가 여기서 무얼 해?" 내가 대답했다. "수술용 로봇을 연구하고 있지." 그러자 이 할머니가 깔깔 웃으며 "너, 농담하는 거지? 아니면 도대체 네가 제 정신이야?"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런 게 나오면 넌 실직하잖아? 네 일자리를 잃는다 말이야, 이 불쌍한 친구야!"
나는 호기심 많은 미국 할머니께 열심히 설명을 했고 그 때부터 우리는 서로 말동무가 되었다. 고혈압에 천식을 앓고 있는 할머니께 나는 건강 상담도 해 드리고, 할머니는 내 서투른 영어 표현도 지적해 주면서 몇 달이 흘렀다. 엄청나게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볕을 즐기고 있는데 슬슬 학습효과가 나타난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닥터 정, 네 말 대로면 앞으로는 환자가 미국에 누워 있어도 네가 멀리 한국에 앉아서 미국의 로봇을 움직여 원격수술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내가 지금껏 할머니께 열심히 설명한 보람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그럼! 바로 그런 이야기지!"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혹시 내가 아프면 제발 네가 수술해줘, 난 미국에 있고 네가 한국에서! 그렇게 해 줄 거지?" 학습효과뿐이 아니라 어느덧 나를 이렇게까지 신뢰하게 되었구나 싶어 뿌듯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그런데 가까운 미국의사도 많은데 왜 하필 내게?" 할머니가 바로 대답했다. "너의 나라가 수술비가 엄청 싸다며!"
할머니의 안부도 궁금하고 내년 봄에는 내가 있었던 그 연구소에 오랜만에 한번 다시 가 봐야겠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