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돌이 박힌돌 뺀다'는 말을 이럴 때 써야하는 걸까? 우리나라의 주도(酒道)야 수십년을 한국땅에 발붙이고 살다보면 생활속에서 자연스레 체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남의 나라 주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시대. 괜시리 원통한 생각도 든다.
"그래, '세계화'에 발맞춰야 한다면 기꺼이 이 한 몸 함께 동참해 주리라." 굳게 마음먹고 색깔마저도 섹시한 와인과 친해지려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문제는 와인이 그리 호락호락한 친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생긴 신조어가 바로 '와인 스트레스'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입맛을 돋우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더 없이 좋다고 찬사를 받는 '신의 물방울'이 왜 한국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의 주범이 되고 말았는가?
▶와인, 모르면 죄
연말연시를 앞두고 2007년 한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지인들을 레스토랑으로 초대한 중소기업 사장 박모(49)씨. 그는 '와인' 때문에 식사 내내 얼굴빛이 평정을 찾을 틈이 없었다.
시작은 와인 주문부터였다. 온통 알 수 없는 이름들만 잔뜩 나열된 와인목록을 보고 당황한 박씨는 "이게 제일 비싼거네. 이걸로 줘 봐."라며 모면하려 했지만 웨이터는 잠시후 와인을 들고와 "시음해보시겠습니까?"라며 잔을 내밀었다. 한 모금 크게 들이킨 박씨, "이건 내 입맛에 너무 떫어. 다른걸로 줘봐."라고 했다가 또 한번 얼굴이 붉어졌다. 와인이 상한 것이 아닌 이상 이미 고른 와인을 바꿔달라는 것은 실례라며 동석자들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와인 용어는 온통 꼬부랑 말만 난무하는 것인가? "풀 바디(full body)에 부케(Bouqet)도 풍부한 것이 정말 맘에 들어요. 타닌(Tannin)성분이 많아 드라이(dry)하고, 피니시(Fimish)에 남는 맛과 향이 매력적인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예, 예."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갔지만 기분 참 거시기하다.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이렇게 무안을 당하다니.
삼성경제연구소 CEO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404명)의 84%가 '와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단다. 그 중 와인을 선택하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33.9%)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와인의 맛과 가격 등을 구분하지 못할 때(25.7%), 상대방이 말하는 와인용어를 잘 모를 때(20.5%), 와인 관련 테이블 매너를 잘 모를 때(3.7%)의 순으로 와인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답했다. 와인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과 기본 지식을 갖춘 대구와인클럽(cafe.daum.net/dgwineclub) 동호회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역시 마찬가지였다. 2명 중 1명은 '와인을 잘 몰라서 주눅들었던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을 정도.
▶배워도, 잘못배워도 문제
얼마전부터 와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김주희(가명'46'여)씨는 요즘 엄청난 와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가장 처음 부딪혔던 문제는 와인 이름 외우기. 익숙지 않은 외래어 상표이다보니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그건 메모를 통해 대충 머리의 한계를 극복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결코 해결나지 않는 것이 바로 와인 맛을 감별하는 문제다. "마셔도 마셔도 비슷한것만 같은데 도데체 뭘 어떻게 표현하야 하는건지…." 김 씨는 "와인 맛에 대해 장황한 수사를 써 가며 몇 분씩이고 늘어놓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고 했다. 와인의 매력에 푹 빠져든 사람들조차도 배워도 배워도 어려운 것이 바로 '와인 맛 감별'과 '와인 이름 외우기'라고. 그래서 설문에 응한 대구와인클럽 회원 3명 중 1명은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워 오히려 와인 스트레스가 가중됐다'는 재미있는 응답을 했다.
워낙 깊고도 넓은 와인의 세계. 그렇다보니 얕은 지식으로 타인의 기분을 망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서 가장 꼴불견으로 손꼽은 것이 '아는척하며 남을 무시하는 태도'. 대구와인클럽의 닉네임 '좋은세상'은 "맛은 주관적인 것인데 자신의 느낌을 주입하려는 자세와, 좀 안다고 남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안타깝다."고 했다. 닉네임 '에스프레소' 역시 같은 생각. "와인도 음식이고 문화인데 아무리 그 사람이 와인에 대해 몰라도 그 입맛까지 한심한 사람 취급하는 것은 와인을 잘못 배워서 그렇겠죠."라고 했다.
가격으로만 와인의 가치를 따지는 태도도 와인에 대한 잘못된 태도 중 하나다. 와인을 배운지 1년이 다 돼 가는 박모(50)씨는 "비싼 와인이 좋은 와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가장 꼴사납다."며 "싸고 질 좋은 와인도 많은 법인데 왜 그렇게 가격으로만 가치를 따지려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그래서 싫단말야
몰라서 무안 당하는 일 많고, 알아도 쉽지 않은 것이 와인이다보니 와인에 대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하모(39)씨는 얼마전 정말 불쾌한 경험을 했다. 모두들 와인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갖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하씨 만이 와인 초짜. 와인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장황하게 이어져 "뭐 기분좋자고 마시는 술인데 대충 마시죠."라고 한마디 했다가 "자네가 몰라서 그렇게 무식한 소리를 하나본데 아는만큼 맛이 느껴지는 거야."라는 따끔한 충고를 들어야 했다. 이후 자리 내내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와인에 대한 이야기만이 오고갔다고. 하씨는 "와인을 마신다면 마치 굉장히 고상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이상한 우월감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일부에서는 자신들만의 인적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와인을 이용하는 경향까지 보여져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고 투덜거렸다.
한모(31)씨 역시 와인을 마시는 자리만 가면 겁부터 덜컥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도 와인이 그리 달갑지 않다. 무식하게 퍼마셔대는 한국인들 특유의 와인주법 때문이다. 한 씨는 "취할때까지 와인을 마신다거나, 마지막에는 꼭 맥주나 폭탄주로 '입가심'을 해야지 자리가 파하는 사람들도 상당수"라며 "그렇게 취하도록 퍼마실거면 차라리 막걸리를 마시지 왜 걸맞지도 않은 고상함을 찾고 그러냐"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냥 마음편히 즐기자
'와인 스트레스'라는 말은 와인을 모르면 세태에 뒤떨어진다거나, 교양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강박증이 낳은 증상이다. 와인에다가 너무 많은 사회학적인 가치부여를 한 탓이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한국의 성향이 '와인열풍'과 함께 '와인 스트레스'까지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와인은 즐기고 마시는 음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남들과 점잖게 한마디 맞장구 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춰서 나쁠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와인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와인전문가인 세계주류 여태용 대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 유행과 집단 쏠림 현상에 조급해하기 보다는 나의 입맛과 취향에 맞게 다양한 와인을 마음 편히 즐기는 것이 가장 와인에 쉽게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여 대표는 "프랑스에서 와인은 평범한 시민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술"이라며 "우리도 와인을 특별한 술로 받아 들이지 맣고, 와인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소믈리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즐기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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