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한 권으로 읽는 이설주

범우비평판 한국문학 이설주편

'키가 커서 훨씬/ 반마(班馬)같이 슬펐으며/ 마음이 여린 탓에/ 거미줄이다/ 때로는 구름위로/ 한사 솟으려다/ 눈물을 바다만큼이나/ 세월의 아픔을 산만큼이나.'('자화상')

시인 이설주(본명 용수·1908~2001)에겐 '비판적 시대정신의 시인'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불행한 시대의 한과 설움을 서정시의 틀에 녹여 뱉어낸 시인이다. 서정시라고 하지만 민족공동체의 슬픈 운명을 가장 인간적인 정서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항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설주의 시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도서출판 범우사가 펴내는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이 43권으로 '이설주편'을 펴냈다.

이설주는 대구에서 태어나 수창초교와 대구고보를 졸업했다. 초등 4학년을 수료하고 바로 대구고보에 들어갈 만큼 성적이 우수했으며, 그의 이름이 당시 신문에 날 정도. 동경유학시절 사상범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후 대학을 중퇴해야 했고, 이후 약소민족의 아픔을 방랑과 허무주의적 성향으로 시에 풀어냈다.

필명 '설주(雪舟)'는 '눈 내린 강가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배'라는 뜻으로 지은 자작명이다. 필명에서도 그의 한 맺힘이 언뜻 드러난다.

그는 1947년 시집 '들국화'를 낸 이후 평생 동안 22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93세의 세수에 64년이나 되는 시력(詩歷)이 다작의 이유도 되겠지만 22권의 시집은 시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어떤 문학단체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문인들과의 교류도 없었던 탓에 어느 평론가는 '포의전전 호적 없는 시인'이라 불렀다.

이 책은 '들국화' '방랑기' '세기의 거화' '삼십육년' 등으로 나눠 250여 편의 시를 담고 있다. 오양호 인천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작품 해설을 맡아 '북방파 시와 방랑의 정체-이설주의 초기 시를 중심으로'를 덧붙였다.

오 교수는 "이설주의 초기 시집 '들국화'(1947)와 '방랑기'(1948)를 지배하고 있는 시의식은 '이향(離鄕)'과 '방랑'의 고통인데, 이것이 이설주의 시에서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에 대한 부정이라는 이중적 운동으로, 서정적 자아를 텅 빈 공간으로 내모는 요인으로 반응했다."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 민족만 있고 국가는 없는 상실감이 서사화되는 시의식으로 시인의 삶 자체를 지배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대구시 달서구 월광수변공원에 '이설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조 시인 이일향 씨는 이설주 시인의 딸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문학에 입문한 그는, 딸 주연아 또한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어 3대에 걸친 문인이라는 특이한 가계를 이루고 있다. 359쪽. 1만 5천 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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