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물이냐 뇌물이냐] 기준은 3만원, 실제는 수백만원짜리

대가성 여부가 뇌물 판단 기준…수천만원 받고도 "떡값·관행"

검사 등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떡값을 줬다는 삼성 비자금 사건, 부하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전 국세청장 사건, 의료계를 대상으로 한 제약업체들의 치열한 로비….

꼬리를 물고 터지는 수뢰(受賂)사건으로 온 나라가 난리다. 하지만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당사자들은 "뇌물이 아닌 선물!" "관행" 등으로 발뺌하고 있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뇌물과 선물의 함수관계를 알아봤다.

올해 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대구의 한 구청 앞에서 공직기강 특별감찰을 하던 국가청렴위원회 감찰단원들은 양주 한 병을 들고 구청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 사람이 찾아간 곳은 구청의 모 과장 자리. 이 구청 간부는 옛 동장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정 때문에 선물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고, 급습한 감찰단에 꼼짝없이 적발되고 말았다. 하지만 '2천 원' 차이로 이 구청 간부는 징계를 모면했다. 감찰단 조사 결과 받은 양주 가격이 2만 8천 원으로 '뇌물'로 인정되는 3만 원에 2천 원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3만 원 이상이면 '뇌물'

공무원들의 '청렴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직자행동강령을 보면 직무수행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는 직무 관련자로부터의 선물 및 향응 수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다만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해 통상적인 관례 범위 안에서 '순수한 선물' 수수는 예외로 하고 있다. 이 행동강령에 따르면 금액상으로 3만 원 상당 이하를 순수한 선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소액이라 하더라도 반대급부가 있는 경우라면 엄격히 금지된다. 어느 경찰관이 교통단속 과정에서 1만 원을 받아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이는 대가성이 있었기 때문. 대구지검 ㅅ 검사는 "1만 원이 됐든 1억 원이 됐든 받은 금품의 액수보단 대가성 여부가 뇌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했다. 특히 직무와 관련 대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금품을 수수했을 경우엔 뇌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기업들도 공직자와 비슷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선물수수 금액 및 식사접대 금액의 기준으로 5만 원 선이면 무방하다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2003년부터 임직원윤리강령 실천지침을 적용하고 있는 대구은행은 임직원들이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식사나 술을 마실 경우엔 1인당 3만 원을 초과하지 않도록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대구은행 준법감시부 곽영도 부부장은 "고객 또는 직무 관련자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은 물론 경조사를 알리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준 따로, 현실 따로

선물과 뇌물을 판별하는 기준을 3만 원 또는 5만 원을 적용한다면 상당수 선물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명절마다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백화점의 '명품 선물 세트'. 100만 원하는 3단 짜리 한과, 200만 원이 넘는 굴비 세트, 365만 원하는 장뇌삼 등 100만 원을 훌쩍 넘는 상품들이 없어서 못파는 지경이다. 이 같은 고가 상품 외에도 일반인들이 많이 찾는 정육이나 과일, 꿀, 술 등에서도 3만 원이나 5만 원을 훌쩍 넘는 상품들이 부지기수다. 회사원 김현철(43) 씨는 "친척들끼리 1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누군가에게 '잘 봐달라'며 전달하는 대가성 뇌물로 쓰이는 게 아닐까란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뇌물의 '인플레 현상'과 모럴 해저드 현상도 심각하다. 전달한 돈의 액수가 수백 만 원에서 2천 만원에 이르는데도 '떡값'으로 지칭하고, 수천만 원을 받고도 '관행'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직장인 권오현(41) 씨는 "10만 원 정도하는 선물을 건네기도, 받기도 부담스러운 것이 대한민국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사정"이라며 "수뢰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할 의욕이 사라지고, 어깨에 힘이 빠진다."고 털어놨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 田目日口?

세상에는 완전한 비밀이 없는 법. 뇌물도 마찬가지다. 뇌물도 혼자 먹는 게 아니라 나눠 먹으며 나중에 일어날 뒤탈을 방지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이른바 전목일구(田目日口). 우선 전(田)은 갈래가 네 개이니 본인이 하나를 먹고 상급자와 차상급자, 차차상급자에게 한 몫씩 올려준다는 얘기다. 목(目)은 본인이 하나를 먹고, 상급자와 차상급자에게 올려주는 식이다. 일(日)은 상급자에게만 바치면 되는 경우이며 구(口)는 저 혼자 꿀꺽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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