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불국사에 가고 싶었다. 가을은 깊을 대로 깊었는데 나는 좀처럼 길을 떠나지 못했다. 어디든 다 마음 탓이겠지만 가을에는 경주의 박물관 뜰이나 불국사 경내를 천천히 거닐고 싶어진다. 토요일 오후를 달렸다. 보문로를 지나는데 은행잎이 늦가을 오후의 바람에 노랗게 넘치도록 흩어지고 있었다.
은행나무 터널을 달려서 오른쪽으로 돌아드니 벚나무 천지다. 봄에는 하얀 꽃구름으로 피어나 꽃비를 뿌려주더니 이제 붉디붉게 물들어서 아름다움을 한껏 뿜어내고 있다.
CD플레이어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끝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서정적인 목소리다. 한창나이 때 즐겨 듣던 노래다. 글을 쓴다며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건만 이 노랫말처럼 멋진 문장 하나 얻지 못했다.
자하문밖 석조에서 흘러넘치는 玉露水(옥로수)를 플라스틱 바가지로 가득 받아 마신다.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청운교·백운교는 방책에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그 계단을 밟지 못하니 가뜩이나 아득한 부처의 세계가 까마득히 멀게 느껴진다. 내가 예토에 발을 묻고 있는 게 내 탓이 아니라 계단 때문인 것 같다면 너무 염치없다 할 것인가.
머지않아 나목이 될 큰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자하문 너머 단풍든 숲을 바라본다. '109번' 나무둥치에 붙은 팻말이다. 문득 108번 나무는 어느 것일까 궁금해진다. 궁금할 뿐 찾지는 않는다. 그 번뇌의 숫자를 찾아서 무엇하랴. 5OOOOO-2OOOOOO, 내 번호는 왜 이리도 긴 것일까.
내가 사는 세상이 복잡해서일 테지. 나 또한 담백하지 못하다. 내 속에 있는 이중적인, 더하여 다중적인 나를 단순화시키고 싶다. 단순하고 무구한 '나'를 과연 내가 잃어버린 것일까. 나란 존재가 본시 무구했던 적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마음에 스며들어 맑은 샘물이 될 설법 한마디 듣고 싶다. 대웅전 회랑을 돌아 無說殿(무설전) 앞에 선다. '경론을 강설하는 강당, 말로써 강설하는 곳임에도 무설이라 한 것은 진리의 본질은 언어수단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역설이다. 텅 빈 무설전에 꽉 찬 말씀을 들으려 마음을 모아보지만 역시 부질없다. 말씀이 있다 한들 알아들을 리가 있겠는가. 경론으로써 진리를 가르치나 진리는 그 경론에 있지 않다. 참으로 멀고 아득한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고 나의 내면은 그 세상보다 더 소란스럽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제각각의 번호를 주어도 세상은 언제나 무질서하다. 그 한가운데서 내 마음이 온갖 잇속에 붙잡혀 있으니 진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동안 단순함이나 무구함이 나를 떠나버렸을 터이다. 그래서 무척 쓸쓸하다.
경내를 천천히 돌아서 느티나무 아래에 오니 한 쌍의 연인이 나란히 앉아서 서로 어깨를 두르고 있다. 오래 전, 늦은 가을 늦은 오후에 노을빛으로 물든 그 나무 아래에는 우리가 앉아 있었다. 나무는 그만큼 더 깊어지고 진중해졌으며 우리는 또 이만큼 나이가 들었다. 만추의 오후, 그게 지금 우리의 시점이다.
박건의 마른 갈잎 같은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어둠이 내린 고속국도를 달린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끝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노래 제목이 겨우 생각났다. 그랬다. 수많은 '그 사람들'을 잊었고 내 이름도 잊어버렸다. 소중한 이름들을 너무 오래 잊고 지낸 것이다. 사랑했으나 잊어버린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고 싶다.
허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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