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끝나고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성주군 금수면의 한 야산. 간간이 출몰하는 공비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의무경찰(일종의 청원경찰)이 된 ㄱ씨는 일행과 함께 사냥을 하기 위해 산을 올랐다. 며칠 후 경찰 행사에 쓸 고깃거리를 마련하려고 꿩이나 토끼, 노루 등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의 손에는 엽총이 아닌 M1 소총이 들려 있었다. 마침 눈이 온 뒤여서 곳곳에 짐승들의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ㄱ씨는 갑자기 온몸이 찌릿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40m 앞에서 커다란 짐승이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 몸 길이가 족히 2m가 넘는 표범이었다. 사냥을 하러 먼저 산에 올라간 사람들을 피해 산을 내려오던 표범과 산을 오르던 ㄱ씨 일행이 맞닥뜨린 것. 흥분을 가라앉힌 ㄱ씨는 표범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표범 대신 땅에 맞았고 놀란 표범은 공중으로 수m를 뛰어올랐다. 4발을 쐈지만 모두 빗나갔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용케 알아챈 표범이 미리 뛰어올라 탄환을 피했다. 다급하게 탄환을 재장전한 ㄱ씨는 이번에는 연발사격을 했고, 탄환을 맞은 표범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다. 조심조심 계곡으로 내려간 ㄱ씨는 표범이 죽은 것을 확인했고, 일행들과 함께 표범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범 이야기 많은 가야산!
엽사 경력이 50년 된 배재의(71·성주군 대가면)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았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옛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흥미진진한 그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표범을 잡자 그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난리가 났지요. 보통 두 마리가 짝을 지어 다니는데 한 마리가 죽어버려 홀로 된 표범이 마을을 덮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어요.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주민들은 방문을 걸어잠그고 꼼짝 못했고, 주민들의 요청으로 경찰들은 밤새 마을을 지켜줬지요."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ㄱ씨는 며칠 후 대구 서문시장으로 죽은 표범을 끌고 와 팔았다. 표범을 사냥했던 ㄱ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가야산에는 유달리 표범이나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성주군 백운리나 마수리 등에 사는 어르신들 중에는 표범, 또는 호랑이를 직접 봤다는 분들이 적지 않다. 1962년에는 가야산에서 표범 한 마리를 생포해 창경원에서 기르기까지 했다는 기록도 있다.
법보사찰 해인사의 역사 등을 기록한 '해인사지(海印寺誌)'에는 잣 따는 사람과 호랑이와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박대석 씨는 나무 타기를 잘하는 잣 수확 전문가다. 그는 중봉 밑에서 잣송이를 따다가 점심 식사 후 쉬는 시간에 바위 밑에서 귀여운 짐승새끼가 보여 아무 생각없이 볼에 대고 비비며 데리고 놀았는데 바위 위에서 갤갤 하는, 고양이과 동물들이 기분좋을 때 내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위 위에서 커다란 어미 호랑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비백산하여 그는 잣 따는 도구도 팽개치고 해인사로 도망한 뒤 기절하였다. 그런데 밤을 지나고 보니 해인사 국사단 뜰에 그가 놓아두고 온 지게, 망태, 낫, 갈퀴 등과 운동화까지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호랑이가 휴식을 취한 바위!
서봉래 전 가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백운분소 소장과 심만권 가천면 신계리 이장도 어릴 적에 호랑이를 봤다고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다. 서 소장이 아버지와 함께 호랑이를 본 곳은 가야산 용기골 백운2교에서 건들바위를 오르는 길에 있는 석간수가 나오는 절벽. 그는 "어릴적 해인사 뒤편으로 조릿대를 찌러 갔는데 실컷 놀고 나선 '호랑이를 봐 무서워 내려왔다.'고 둘러대면 어른들이 믿어줄 정도였다."고 했다. 또 심 이장은 밤이면 옥계 부근에서 번쩍이는 동물의 눈을 자주 봤는데 어르신들의 말씀으로는 호랑이였다는 것이다. 포천계곡으로도 불리는 옥계의 너럭바위 부근에서 하류로 200m를 내려오면 '턱걸이 바위'도 호랑이와 얽힌 이야기를 갖고 있다. 심 이장은 "가야산과 태백산을 오가는 호랑이가 이 바위에서 앞발로 턱을 괴고 쉬어 턱걸이란 바위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야산에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살고 있을까? 다시 배재의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호랑이는 몰라도 표범은 아직도 가야산에 있다고 봐요. 가야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금오산, 지리산 등 반경 300~400km를 영역으로 하는 표범이 살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배 씨는 표범으로 추정되는 고양이과 동물의 발자국을 매번 겨울이면 발견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요즘도 겨울이면 가야산에 오르는데 눈 위에 찍힌 지름 15cm 이상 되는 동물의 발자국을 어김없이 발견하곤 합니다. 살쾡이 경우 발자국의 크기가 4, 5cm 정도에 불과하지요. 이만한 크기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동물은 표범말고는 없어요."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땅!
64, 65년 무렵 배 씨는 표범을 잡기 위해 직접 가야산을 샅샅이 누빈 적도 있다. 표범의 이동 경로로 알려진 경남 거창군 가북면 개금마을이나 성주군 가천면 굴바위 부근에서 잠복을 했다. 표범을 잡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표범의 실존에 대해 배 씨는 강하게 확신했다.
"표범을 추적하던 중 얼마 전까지 머무르던 장소를 발견한 적도 있지요. 수풀을 깔고 꼬리로 바닥을 치며 휴식을 취한 모양인데, 그 흔적으로 미뤄 2m를 넘는 큰 놈으로 보였지요." 노루의 일종인 대작이나 멧돼지 등을 숱하게 사냥한 배 씨는 "가야산은 큰 바람을 막아주고, 비가 적당하게 내리게 해 사람들에게 농사짓기에 좋은 터전을 마련해주고 있다."며 "표범과 같은 동물들에게도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얘기했다.
호랑이나 표범은 우리 조상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존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호랑이 경우엔 산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배 씨의 이야기를 다 듣고 멀리서 바라본 가야산! 호랑이와 표범과 같은 동물들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며 살았던 그 옛날 가야산처럼 이 시대 인간들과 동물들과의 삶도 상생의 미덕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졌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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