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호가 처음에는 지타(芝陀)였지. 마침 여학교 훈장(경기여고)으로 갔는데, 내 호를 말했더니 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더군.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니, '지타'라는 호야 아주 고상하지만, 성과 합성하니까, 발음이 '조지타'가 되는데, 걔네들이 내 호에서 다른 무엇(?)을 연상했나 봐. 그래 할 수 없이 지훈으로 고쳤어."
지훈의 해학적인 성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훈은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48세에 이슬처럼 떠났다. 짧은 생애임에도 주옥같은 시와 산문을 남겼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참 선비의 모습을 남겨 놓았다. 지훈의 언어는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리가 있었고 우스갯소리임에도 남다른 지혜로움이 있었다.
지훈의 집 대문에서 바라보는 문필봉의 풍경도 좋다. 제법 넓은 들판 너머에 우뚝 선 붓 모양의 문필봉은 지훈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음 일정에 쫓겨 마을을 돌아 나오면서 지훈이 어렸을 때 공부를 했다는 '월록서당'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지훈 문학관 건립 현장도 살펴보았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마을 입구 소나무 숲 사이에는 지훈의 시비가 있다.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쳐 춤과 노래를 가꾸어 빛을 찾아가는' 지훈의 아름다운 마음이 거기에 담겨 있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 바위틈에 어리 우는 물을 마시면 //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 푸 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 춤과 노래도 가꾸어보자. //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조지훈, 전문)
지훈은 1939년 《문장》에 과 를 정지용의 추천으로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은 그 제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한국의 고전적 생활 문화에 담긴 여성적 품위와 의상미가 결합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에서는 고궁의 쇠락한 모습을 통해 조선시대의 주권을 행사한 권력자들과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을 대비하여 피지배자의 고통과 비장감을 토로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의식과 민족의식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 지훈의 시적 성과는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펴낸 《청록집》에 집약되어 있다. 해방 공간에서 지훈은 순수한 시정신을 지키는 사람만이 시인으로 바로설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자유를 옹호하고 인간성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적 열정은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 지사적인 목소리로 나타난다. 당대 정치의 부패상과 사회적 부조리, 민족 분열과 동족상잔이라는 타락한 현실을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비판한다. 특히 는 전쟁의 참상을 체험한 바탕 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을 절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시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결국 그의 시작품의 근원적 세계인 '자연'이란 좁게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게는 그가 체험한 삶 전체를 포괄하는 자연인 셈이다. 특히 이 '자연'은 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자아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역사의식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입에는 늘 막걸리 냄새를 풍기고 다녔지만 내면에는 이슬과 같은 맑은 향기를 품고 살았던 지훈, 아쉬움과 함께 주실마을을 떠나면서 칼날 같은 그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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