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찼다.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새소리가 파도소리에 부딪혔다. 돌계단을 올랐다. 굳은 손을 비벼도 좀체 펴지지 않았다. 옷깃을 여몄다. 목을 움츠렸다. 겨울 초입의 산기슭, 늦가을의 정취는 없었다.
연인들은 달랐다. 두 손을 부여잡거나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산길을 걸었다. 마주 본 눈길은 떼지지 않았고, 얼굴은 환했다. 따뜻한 입김이 찬바람을 적셨다.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춘들의 속삭임이 귓속을 간지럽게 했다. 두 달 사귄 새내기 연인부터 8년차 예비부부까지 수도권 관광객 34명이 올해 막바지 가을여행이자, 첫 겨울나들이를 울진과 청송에서 즐겼다.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린 왕피천을 끼고 있는 근남면 산포리 망양정. 포구에서 산기슭을 5분쯤 오르자 짙푸른 바다, 은빛 모래사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망양정은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는 쉼 없이 흰 파도를 내뱉었다. 부서지고 출렁이고, 또 부서졌다. 가슴 속 상념까지 씻어 내렸다. 곁에는 해맞이공원과 산책로가 연인들을 유혹했다. 산과 바다와 내(川)가 잘 어우러졌다.
이곳 절경을 노래한 송강 정철의 노래(관동별곡)가 들리는 듯했다. '망양정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뉘라서 놀래관대/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히 구는지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나리는 듯/ 오월장천에 백설은 무삼일고. 져근덧 밤이 들어/ 풍랑이 정하거늘/ 부상지척(扶桑咫尺)에 명월을 기다리니/ 서광천장(瑞光千丈)이 뵈는 듯 숨는고야. 주렴을 고쳐 걸고/ 옥계를 다시 쓸며/ 계명성(啓明星) 돋도록 고초 앉아 바라보니/ 백련화 한 가지를 뉘라서 보내신고. 이 좋은 세계 남대되 다 뵈고져….' 조선 숙종은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며 망양정에 '관동제일루'란 친필 편액을 하사했다고 한다.
버스는 삼풍백화점 붕괴로 숨진 연인의 추억을 되짚어가는 영화 '가을로'를 따라 불영계곡으로 달렸다. 꼬불꼬불 산길은 위로만 올랐고, 계곡은 자꾸만 깊이 내려갔다. 푸른 계곡물이 나무 그림자에 밟혀 더욱 짙었다. 화강암이 빚어낸 흰색 바위가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어놓았다. 돌과 바위가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숨었다 했다. 차창밖으로 얼굴을 내미느라 목이 뻐근했다.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km에 이르는 기암괴석과 푸른 물을 간직한 계곡이었다. 의상대, 거북돌, 조계등, 소라산, 창옥벽, 사랑바위 등 절경을 한꺼번에 담아내려는 욕심에 눈이 시렸다. 불영정과 선유정에서 내려다본 계곡은 신혼 첫날 밤, 여인의 속옷을 헤집듯 가슴을 벅차게 했다.
부처님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이름 붙여진 불영사. 계곡과 숲 사이로 난 길이 고즈넉했다. 산새의 지저귐과 연인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뒤섞여 숲길의 적막감을 깨뜨렸다. 비구니들이 가꾼 꽃밭과 채소밭이 눈길을 모았다. 천축산의 바위 그림자들이 투영된 연못을 지나 아담한 사찰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대웅보전 기단 밑에는 돌거북 2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사찰에서 보시하는 국수 한 그릇이 꿀맛이었다.
'가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평해면 월송리 월송정. 울창한 소나무 숲이 동해의 찬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솔향과 바닷바람이 코를 찔렀다. 빽빽이 들어찬 노송을 지나 명사십리의 바다풍경으로 안내하는 길목이었다.
조선 성종이 국내 이름난 화공을 시켜 '팔도의 사정(활을 쏘는 터의 정자) 중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을 그려오라.'고 하자,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을 그려 올렸다. 이에 성종은 '용흥각의 연꽃과 버들이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할 수 없다.'고 했단다.
옛 신라 화랑들이 푸른 소나무와 흰 모래밭에서 큰 뜻을 품었던 도장이었지만, 영화 '가을로'의 현우와 세진이 나란히 일출을 바라보던 곳이기도 하다. 정자의 2층 누각에서 바라본 쪽빛 바다에 눈이 부셨다. 연인들이 모래사장을 덮치는 파도를 따라 아이들처럼 뛰놀았다. 삼각대를 두고 추억을 담는 쌍, 허리를 껴안고 가만히 먼 바다를 응시하는 쌍, 짝을 등에 업고 뛰다 모래밭에 넘어지는 쌍, 연인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쉼없이 울려 퍼졌다. 웃음소리는 파도를 타고 흘렀다. 월송정은 연인들의 숲이고, 바다였다.
다음 날 연인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촬영지, 주산지를 찾았다. 왕버들 30여 그루가 아침 햇살을 받아 연못에 검푸른 그림자를 그렸다. 300년 동안 물이 마른 적이 없는 인공 호수.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꿈 속을 헤매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왕산과 왕버들, 연못이 어우러진 주산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연인들만의 공간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주산지에서 주왕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전사에서 제3폭포까지 맑은 물과 공기를 음미하며 걷는 길은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그리 힘들지 않아 사랑받는 코스다. 망양정-불영계곡-월송정-주산지로 이어지는 길은 연인들의 '사랑으로' 코스였다.
★경험자 토크
▷구경자(39·서울 강서구 화곡동)=아늑하고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이 맘에 들었다. 음식과 숙박도 기대 이상이다.
▷김경훈(36·서울 강서구 화곡동)=주산지와 월송정 등 풍경이 멋졌다. 볼거리가 많았지만, 저녁시간대 관광객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벤트가 없어 아쉬웠다.
▷이일석(32·서울 성동구 성수동)=경북에는 처음인데 바다와 산, 계곡을 함께 맛볼 수 있는 환상적인 코스였다. 1박2일로 하니 한 곳을 찬찬히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았다.
▷강혜민(29·서울 강남구 논현동)=8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랑 경북에 왔는데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바다와 계곡이 함께 어우러진 울진 동해안 풍경이 마음에 쏙 든다.
▷민종준(26·인천시 동구 만석동)=영화촬영지 주산지를 와보고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프로그램이 데이트 코스로는 손색이 없었다. 숙박지의 방음, 온수 등이 좀 보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애진(22·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주산지, 월송정, 망양정은 다음에 또 보고 싶다. 경북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주머니 팁
(단위 원, 교통비 제외, 1인 비용)
▷첫날
점심 산채비빔밥 5000
저녁 해물전골 8000
모텔 40000
▷둘째 날
아침 해물된장 5000
주왕산 주차료 5000
점심 산채정식 10000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msnet.co.kr 청송·김경돈기자 kd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한덕수 탄핵소추안 항의하는 與, 미소짓는 이재명…"역사적 한 장면"
불공정 자백 선관위, 부정선거 의혹 자폭? [석민의News픽]
헌정사 초유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제2의 IMF 우려"
계엄 당일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복면 씌워 벙커로"
무릎 꿇은 이재명, 유가족 만나 "할 수 있는 최선 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