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힌다. 줄거리를 따라 사건의 전개를 충실히 읽을 수도 있고,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에서 비롯되는 어떤 결정과정을 읽을 수도 있다. 또 문학작품을 매개로 문학작품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실재 사회를 읽을 수도 있다.
소설 '완장'은 오래된 소설이다. 1983년에 초판 1쇄가 발행됐으니 25년이 되어 간다. 소설 속 '관상대'가 '기상청'으로 바뀐지도 17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바뀌었는데도 완장을 찾는 독자는 많다. 우리 사회에 '완장'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양과 크기가 변했을 뿐 완장은 인간사회 어디나 '편재'한다.
저수지를 빌린 최 사장은 그곳을 양어장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그래서 도둑 낚시를 방지하기 위해 감시원을 고용한다. 감시원은 지금까지 저수지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물고기를 도둑질해가던 임종술이다.
종술은 완장을 차고 저수지 감시원이 되면서 사람이 변한다. 도둑 낚시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47만평 저수지를 영지로 둔 영주로 착각한다. 이제 그에게 저수지는 월급 몇 푼 받고 지키는 물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영토'다. 바야흐로 종술은 도둑 낚시꾼뿐만 아니라 자신을 감시원으로 임명한 사장의 낚시도 금한다.
저수지로 낚시를 나온 사장 일행을 곤란하게 만든 죄로 관리인 자리를 박탈당하지만 종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장이 해고를 선언했지만 종술은 저수지를 떠나지 않는다.
"누구도 저수지의 고기를 잡거나 물을 뺄 수 없다."
저수지는 가뭄 때 논농사를 위해 물을 가둔 것이다. 가뭄이 심해지고 모내기를 위해 물을 빼려하자 종술은 이를 막는다. 저수지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종술의 육신이며 영혼이다. 종술에게 저수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종술은 이제 '완장의 폭력성'과 하나가 됐다.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임종술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인물인 초등학교시절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종술아, 남들보다 잘났다는 표적으로 차고 댕기는 것이 완장이란 말이냐?"
"뭐 잘났을 것까지에 있을꼬마는…… 그렇다고 못났을 것도 없지요."
"아니다. 모자란다는 뜻이다. 모자란 만침 아직도 더 채울 것이 있는 사람이란 표시니라."
팔에 찬 완장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도 '완장'에 다름없다. 작가는 우리가 팔뚝이든 허리든, 가슴속이든 '완장'을 갖고 있는 한 '아직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 속에는 '완장 비판'만 있는 게 아니다.
임종술의 어머니 운암댁.
그녀는 완장으로 남편을 잃고, 큰아들을 잃었다. '인민군 완장'을 차고 길길이 날뛰던 남편은 세상이 바뀌자 소식이 끊어졌다. 남은 아들 종술은 인간 말종이다. 며느리는 아들이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도망갔다. 운암댁은 손녀를 맡아 키운다. 운암댁의 불행한 인생과 임종술이 좋아지내는 술집 작부 부월이의 이야기는 이 소설이 완장을 매개로 한 계몽소설, 혹은 이데올로기 소설이 아니라 '인간소설'임을 보여준다.
'완장'으로 남편 잃고 자식 잃고, 남은 자식마저 잃게 된 운암댁의 불행은 '완장의 불행'이 당대의 불행이 아니라 사람살이에 상존하는 '불행'임을 이야기는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가뭄이 심해지자 수리조합은 저수지에서 물을 뺐다. 임종술은 경찰관을 폭행하고 어디론가 도망쳤다. 아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저수지였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저수지로 달려나온 어머니 운암댁은 저수지 물문 위에 서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이 빠지고 나면 고기를 잡아 일당을 벌어야 한다. '늙은 운암댁도 살아야 하기에….' 이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에 대한 작가의 눈물겨운 애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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