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에 이어 살얼음이 얼고. 첫 눈이 내린다는 소설도 지났다. 잎 넓은 낙엽은 모두 떨어졌다. 이제 영락없는 겨울이다. 겨울이 되면 좋은 것도 많았지만 나쁜 것도 많았다. 좋은 일은 연날리기, 홍시, 썰매를 타거나 눈싸움을 하는 게 좋지만 나쁜 건 무엇보다 바람이다. 그 겨울의 날선 북풍을 견디며 뛰놀다 보면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나고 양 볼은 터실터실 터서 매일같이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다녔다. 그래도 우린 그렇게 추운 겨울, 바람의 아들이 되었다.
조무래기들은 해바라기를 하면서 벽에 기대고 서 있다. 벽을 나서면 매서운 찬바람이 괴롭힌다. 해바라기를 두어 명 하고 있을 때는 자리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침 먹고 조금 지나면 아이들이 하나 둘, 동네 배꼽마당 정기네 담벼락으로 모여든다. 바람 불고 햇볕 따뜻한 날엔 정기네 흙 담이 제일 따뜻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정기네 흙 담이 그리 넓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일렬로 늘어서면 다섯 명까지가 정원이고 그 나머진 칼바람을 맞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늦게 온 주제들이 몸을 비집고 끼어든다. 먼저 와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녀석들이 그것도 텃세라고 절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어떨 땐 몸싸움이 주먹다짐으로 바뀔 때도 있다.
그 깐 바람을 피하려고 자리싸움을 하던 것도 잠시,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사내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하고 계집애들은 고무줄놀이를 한다.
바람은 밤이 되면 더 겁나게 분다. 아마 밤이 되면 사위가 더 조용해서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모양이다. 바람소리가 '휘이잉 휘잉' 거리는 소리에서 그야말로 쌩쌩 거리는 음향으로 바뀔 때면 이불속에 들어있던 우리 가슴이 더 오그라들었다.
귀신소리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전설 따라 삼천리' 라디오 극을 듣고 난 뒤엔 오줌 누려도 못 갔다. 뒷문 열고 툇마루까지 안 나가고 방안에서 그대로 발사하고는 얼른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다. 아침이면 꼼짝없이 그 오줌은 얼어 있었다.
겨울바람이 불면 신나는 일 중에 하나가 연날리기다. 그런데 왜 연날리기는 겨울바람에 많이 하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궁금했다. 어찌어찌 자료를 찾아보니 겨울 북풍은 일정한 방향으로 만 부니까 연날리기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뻔한 얘기지만 조금 더 부연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서풍이 부는 이유는 한반도 머리 꼭대기에 걸쳐있는 시베리아 고기압 때문인데, 중국에선 북서풍이 아니고 북동풍이 부는 이유다.
어쨌건 아이들은 창호지와 댓살을 다듬어 가오리연을 만들었다. 삼촌이 있는 녀석은 방패연까지 들고 왔지만 방패연은 높은데 까지 날려야 제 맛인데 동네에선 가오리연만 못하다. 조무래기들은 뭐니 뭐니 해도 가오리연이 최고다.
가오리연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연의 중심을 잡는 게 제일 중요하다. 30대만 하더라도 연의 중심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실제 연날리기 강습을 해보면 3~40대 초반의 아버지들은 연줄의 중심을 잘 못 잡았다. 아니면 다 잊어버렸거나...
가오리면의 중간 댓살을 기준으로 윗부분 3/2 지점에 또 다른 가는 대살로 활처럼 휘게 해서 창호지로 바르고 아래쪽에서 3/1 지점에 꽁수구멍을 뚫어야 한다. 꽁수구멍과 댓살이 교차하는 지점에 윗구멍을 뚫어 실을 매고 실을 잡고 연을 들었을 때 윗부분이 3/1 지점에 목줄을 매어야 한다. 만일 목줄을 중간에 맨다면 연이 방향을 잃고 제 멋대로 춤을 추는 원인이 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목줄을 맬 때 고리를 해서 묶어두면 나중에 균형을 잡을 때 쉽게 목줄을 옮길 수 있다.
겨울바람은 언제나 불기 때문에 연을 띄우기만 하면 된다. 달릴 필요도 없고 목줄을 조일 필요도 없다. 연줄만 풀면 연은 저절로 바람이 된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가슴 설레던 연날리기였다. 나 대신 하늘을 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놀이였다. 훗날 중학생이 되어서 연 끊어먹기 같은 고난도 기술을 부릴 때 보다 막연히 하늘에 날리던 그 때가 더 기억이 새롭다.
경남 합천군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한밭새터 '바람흔적미술관'(055-933-4476)이 있다. 철물로 만든 커다란 바람개비들이 너무 멋있다. 모두 22개로 되어 있는데, 22의 숫자는 바람 속에 있는 산소의 함유율이란다. 글쎄, 과학 지식이 부족해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곳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오죽했으면 '바람흔적'이란 멋진 명칭이 붙었을까. 지난해 이곳에서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함께 모여 연날리기 체험을 가졌다.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신나하던 연날리기. 멋지지 않나요? 바람흔적미술관에서 바람놀이로 연날리기를 해보세요.
더 흥미로운 것은 이곳 정미선(41)관장은 라이브 통기타 가수이다. '꽃반지 끼고'와 같은 추억의 노래를 잘 부른다. 한대수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같이 흥얼거렸으면 좋겠다.
김경호(아이눈체험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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