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을 넘긴 그녀가 가실을 찾았다. 경북 왜관읍 낙산리. 낙동강변의 작은 마을. 올해로 111년 된 고풍스런 가실성당이 강의 윤슬(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나지막이 내려다보는 양지바른 곳이다.
미국 뉴욕에서 30년간 교편을 잡은 시인 백영희(65)의 어린 추억이 담긴 곳이다. "예전에 여기는 전부 사과밭이었어요. 강물도 얼마나 맑았는데… ." 그것이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공단이 생겨 사과밭에는 공장이 들어서고, 넓은 도로에 소음벽까지 생겨 강이 보이지 않는다. 고향을 찾는다는 마음에 들떴던 그녀의 표정에 잠시 어둠이 내린다.
"어린 시절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주인공 채영신처럼 되고 싶었다. 어느 날 보니 그녀는 낙동강이 흐르는 시골 초등학교가 아닌 21세기 세계의 중심 미국, 그것도 최대 도시 뉴욕에서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1968년 미국에 간 지 40년, 그 중 30년을 교사로 미국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때 겪은 느낌과 생각을 글로 옮겼다. 책 제목이 '가실의 봄 뉴욕의 가을'(분도출판사 펴냄)이다. 두 권의 시집 '저지레'와 '풀꽃행렬'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에는 교육자로서의 삶과 미국 교육현장의 풍경, 그리고 단상이 담겨 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판 평화신문에 수록된 칼럼을 엮은 것이다. 낮에는 미국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한국 아이들과 지내고, 밤에는 학부모와 함께 고민하는 3배의 일을 해낸 그녀의 교육철학을 잘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한국 아이들은 수학을 잘해요. 미국아이들이 놀라죠." 구구셈을 외워 바로 '2×3=6'이 나온 한국 아이와 '2+2+2'로 '6'을 찾아내는 미국 아이들의 차이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 가면 역전된다.
그녀는 "과정보다 정답 찾기에 익숙한 우리 교육 방법의 문제"라고 했다. 수학뿐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것도 차이가 난다. "한국 학부모들은 공부 안하는 시간은 논다고 여기죠." 그러나 남들에게 봉사한다거나, 바자회를 열어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보는 일은 세상사에 큰 경험이 된다.
시를 쓰고, 글을 쓰는 그녀가 본 한국의 논술교육도 문제다. "글을 생각과 마음으로 써야 되는데, 아예 단답형 답안을 내놓고 글을 쓰더군요." 그녀는 "우리 예쁜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등쌀에 너무 힘들고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옛 집터를 지나, 가실성당을 거쳐 간 곳이 낙산초등학교. 판자로 지은 옛 건물과는 달리 말끔한 현대식 교사(校舍). 그 속에서 40여 명의 어린 아이들과 만났다. 같이 점심을 급식해 먹고,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그녀의 표정이 금방 동심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너무 귀엽죠?"라는 그녀의 표정이 흡사 외할머니처럼 밝다.
책에는 먼 이국에서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향수, 동포에 대한 연민과 사랑도 잘 묻어난다. 또 뉴요커로 살아가는 단상과 노년의 미학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과 꿈을' '민족이 무엇이기에' '은총의 눈물' '맨해튼 전도사' 등 5개로 구성된 책은 '내 고향 가실'로 끝을 맺는다.
가실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다. 대구에서 학교(경북여고 졸업)를 다녔고, 서울에서 대학(이화여대 사회학과 졸업)을 마쳤지만 그녀의 마음에 '가실(嘉室)'은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곳이다. 뉴욕대(이중언어교육학 석사)에서 24세나 어린 띠동갑 아이들과 앉아서 공부를 하면서도 잊지 못한 가실이다.
지금도 그녀는 꿈이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치지 않는 일이다. "이 책이 팔리면 수익금을 모두 가난한 아이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많이 팔리길 기도해 주세요." 늦가을의 정취가 쓸쓸했지만, 그녀에게 가실은 늘 꿈이 있는 봄이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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