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남이가 우리 식구가 된 것은 몇 달 전쯤의 일이다.
치와와 몇 교배종의 잡종인 쾌남이와 첫 대면 순간. '아! 세상에 저렇게도 못생긴 놈도 있구나.' 한쪽 귀만 쫑긋하고 톡 발가진 눈은 동네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 팽개쳐 버린 유리 구슬처럼 퉁명스럽다. 그 녀석은 첫날부터 경거망동했다. 거실이며 안방이며 종종걸음으로 쏘다닌다.
밥상을 펴면 그곳에다 지저분한 코를 실룩거리며 접근해 두발을 올려놓는다. 조그만 놈이 먹기는 옹차게 먹는다. 뱃속에는 밥통밖에 없는 것 같았다. 뒤뚱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모습 또한 볼 만했다. 그리고는 햇빛 찐한 양지쪽 잔디밭에 휴식을 취하여 소화를 다 시키고 나면 영락없이 현관 앞으로 가서 실례를 하곤 했다.
그날도 쾌남이는 내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내가 아내답지 않게 폭력을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녀석을 싫어했다. 자식 하나 더 키우는 수고가 든다느니 개 밥그릇까지 설거지해야 한다느니 불평이 많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내는 쾌남이를 많이 사랑해 주자는 것이었다. 쾌남이의 지나온 과거를 듣고 보니 불쌍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녀석이 우리식구가 된 것은 길고 긴 고통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그 녀석의 다섯 번째 주인이 된 셈이다. 첫째 둘째 셋째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어쨌든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추측건대 아무데나 실례하는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네 번째 주인이 봉달 아저씨였다. 그때 그 녀석의 이름은 쾌남이가 아니고 땡칠이었다. 그러나 봉달이 아저씨 집에도 오래 살 수가 없었다. 집 주인이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제집 없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며 이런 저런 눈치 보며 사는데, 그 녀석 때문에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집 없고 서러움을 한 몸에 지닌 채 정든 네 번째 주인집을 떠나야 했다.
그녀석이 우리 집에 오면서 나는 쾌남이라고 이름을 건사하게 지어 주었다. 매일 목욕을 시키고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게 했다. 못 먹는 게 없었다. 김치도 과일도 잘 먹고 애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퇴근하고 오면 바짓가랑이를 물고 뺑뺑이를 돌고, 앉으면 냉큼 무릎 위에 올라앉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마구잡이 실례를 하는 버릇이 있었으나 사랑으로 감싸고 보살피고 했더니 실례도 할 곳을 찾아서 하고 오줌이 마려우면 창문을 발로 두드리기까지 했다.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집없는 설움을 당하는 인간 쾌남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이 쾌남이를 변하게 했듯이 힘없는 이들을 조금만이라도 배려해 준다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연우(대구시 남구 대명8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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