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마음이 쓸쓸해진다. 울긋불긋 도시를 물들였던 나뭇잎들이 하나둘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상념에 젖게 된다. 앙상한 가로수에선 처량함마저 느껴진다. 도시를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몸은 물론 마음마저 시려온다. 무상한 계절의 변화에다 또 한 해의 끝자락에 섰다는 처연(悽然·쓸쓸하고 구슬픈 모양)한 기분 탓에 마음은 더욱 착잡하다. "해놓은 것은 없이 또 한 해가 가는구나!"란 자괴감에 마음이 더 무겁다.
쓸쓸한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길!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지만 세상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게 바로 마음이다. 조그만 일이나 말에 상처받기도 하고, 어떨 때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에 나 혼자뿐이란 생각을 들게 하는 것도 마음이 주관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술을 마시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사람들은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 한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는 데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산을 찾는 것도 훌륭한 비법 중 하나다. 산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신비한 치유 능력을 갖고 있다.
성주군 가천면(伽泉面) 마수리(馬水里). 가야산 정상 칠불봉의 북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만수동(萬壽洞)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난세 때마다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많은 사람들이 은거하기도 했다. 옛 사람들은 난리를 피해 은거했지만 요즘 사람들에겐 마음을 달래는 데 안성맞춤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유려한 가야산 자락을 따라 자리 잡은 마을, 그 마을을 감싸안으며 우뚝 솟은 가야산,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계곡…. 도시생활로 찌들었던 마음의 때가 금세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마수리 서북쪽에 있는 죽전(竹田)폭포 부근에서 가야산 정상 칠불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호젓한 매력을 갖고 있다. 비법정 등산로여서 오가는 사람이 적고 철계단과 같은 인공시설도 전혀 없는 자연 그대로의 등산로다. 죽전폭포 부근에 차를 세우고 임도(林道)를 따라 산행에 나선다. 가야산에서 벤 나무를 옮기기 위해 닦아놓은 임도는 푸근한 느낌을 주는 흙길이다. 트럭이 다닐 정도로 넓지만 평일이어서 오가는 사람이 없다. 사색을 하며 걷기에 그만이다.
임도를 따라가는 등산로에서 가장 먼저 손짓하는 것은 낙엽송. 황금색으로 물든 높이 20~30m의 낙엽송 군락이 등산객을 정겹게 맞는다. 나무에서 떨어진 소나무 잎들이 임도를 뒤덮어 길도 황금색이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선 낙엽송의 황금색이 더욱 눈이 부시다. 예전에는 전신주나 집을 짓는 목재로 쓰였지만 지금은 땔감 외엔 쓰일 곳이 적어 베어가는 사람이 없단다. 그래선지 모두들 키가 크다.
황금빛 길을 걸으며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이 시에 나오는 길도 이 임도처럼 '노란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이다.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인은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은 길을 택해 걷는다. 그러면서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시인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면 사람들은 마음을 따라 그 길을 택해 걷지만,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이뤄지지 않은 사랑, 맺지 못한 인연을 더욱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 계절이 공존하는 가야산!
20여 분을 걸으니 커다란 계곡이 나온다. 아래쪽에 있는 죽전폭포로 흘러가는 계곡이다. 여기에서 임도를 버리고 계곡을 따라 난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등산로에는 참나무 등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다. 계곡을 따라 걷는 등산로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어떨 때엔 푸른 빛을 띤 산죽(山竹)을 헤치며 걷기도 하고, 어떨 때엔 우람한 바위들이 자리 잡은 너덜지대를 걷는다. 굴곡이 있는 인생이 드라마틱한 것처럼 등산로도 변화가 있어야 잔잔한 재미를 안겨준다.
어느새 계곡이 끝나고 오르막 길을 40여 분 정도 올랐을까. 남쪽으로 칠불봉이 올려다 보이는 작은 능선에 닿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급경사 오르막길이다. 마른 목을 축이고, 다시 산행에 나선다. 양 옆으로 펼쳐진 가야산 능선을 바라보며, 등산로를 걷다 보니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마수리에서 3.7㎞를 올라온 곳이다. 칠불봉까지는 아직도 1㎞가 남았다. 이 이정표는 죽전폭포에서 칠불봉을 오르는 등산로에서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반갑게 여겨진다.
가팔라지는 등산로를 따라 걷다 한순간 "아!"하는 탄성이 나온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보는 눈 때문이다. 햇빛이 덜 비치는 가야산 북쪽 등산로를 걷는 덕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안 가득 눈을 만져본다. 가야산 아랫자락은 만추(晩秋)이지만 해발 1천m를 넘는 이곳엔 벌써 겨울이 왔다. 지금 가야산에는 두 계절이 공존(共存)하고 있다.
아이젠을 꺼내 신고 다시 눈으로 미끄러워진 바위를 오르며 산행을 계속한다. 온몸에 땀이 흐르지만, 그만큼 정신은 맑아오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칠불봉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다가온다. 죽전폭포를 출발한 지 2시간 30분 만에 우두봉 옆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착했다. 포근한 산 아래와 달리 정상 부근에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분다. 우두봉에 올라 보니 여름날 개구리들의 놀이터였던 우비정은 꽁꽁 얼었다.
드디어 정상인 칠불봉. 사방으로 확 트여진 시야에 눈은 물론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쓸쓸한 마음도 매서운 바람에 날려간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른 가야산. 산은 그 넉넉한 품과 청정한 기운으로 산에 오른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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