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고, 부수고, 밀고, 새로 짓고….'
지금껏 우리의 개발 논리는 무조건 이런 식이었다. 옛 건물은 헐어버리고 그 위에 네모반듯한 건물을 으리으리하게 지었다. 이런 개발시대의 건축방식은 '자치단체장 치적'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음에도 아직도 그칠 줄 모른다. 일찍이 도시가 발달하고 이에 맞춰 건축술을 연마한 유럽에서는 이런 식의 개발보다는 기존 건물을 살리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알맹이만 바꿨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게이츠헤드의 볼틱현대미술관은 각각 화력발전소와 제분소를 개조한 공간이다. 지난달 22일 방문한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템스강 남쪽 강변에 위치한 테이트 모던을 찾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높이 99m로 우뚝 솟아 있는 굴뚝 때문. 이는 바로 테이트 모던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테이트 모던의 모태는 1981년 문을 닫은 뱅크사이드(Bankside) 화력발전소이다.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 길버트 스콧 경(격자창이 있는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 설계자)이 설계한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는 산업시대의 중추적인 전력 공급처였지만, 유가 급등으로 폐쇄됐다.
이후 유휴시설이었던 이곳은 2000년 새롭게 리모델링 돼 세계에서 손꼽히는 현대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벤자민 휘태커(Benjamin Whitaker) 방문자 서비스팀장은 "건축 설계 국제 공모 결과 발전소 외양을 그대로 살리는 안이 채택됐다."고 설명했다.
옛것을 살리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영국인 성향도 있겠지만 "영국이 낳은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휘태커 팀장의 이야기다. 자크 에르조그와 피에르 드 뮈롱이라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두 건축가는 설계안에서 굴뚝을 화력발전소의 상징으로 남겨두었다.
미술관 내부에도 발전소 시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테이트 모던 로비에 들어서면 발전 당시 쓰던 커다란 기중기가 천장에 있다. 휘태커 팀장은 이 시설을 "아직도 작품을 옮기는데 쓰고 있다."고 했다. 발전소를 지탱하던 철골, 관제실이 있던 방의 구조물, 옆에서 여전히 윙윙 소리를 내는 발전실 등 테이트 모던은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의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었다.
런던 북부의 뉴캐슬 공항에서 버스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게이츠헤드. 타인(Tyne)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 뉴캐슬과 붙어 있는 이곳은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밀레니엄 브리지(다리)와 세이지 게이츠헤드 음악당, 볼틱현대미술관 등은 한 해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의 발길을 끈다. 이 가운데 볼틱현대미술관(Baltic Centre for Contemporary Art)은 테이트 모던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1950년대 볼틱 제분소(Baltic Flour Mill)의 일부였던 곡물창고 건물이 5년간에 걸친 개조 작업을 통해 2002년 7월 현대미술의 공장(Art Factory)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 건물은 1972년 이후 생산 활동이 중단된 채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해 100만여 명의 관람객을 맞이하며 세이지 음악당과 함께 매년 1천200만 파운드(약 230억 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낳는 장소가 됐다.
◆과거가 그대로 살아있는 공간
독일에는 영국보다 더 많은 사례가 있다. 베를린의 UFA 파브릭, 타클레스, 발하우스 나우니스트라세, 쿨투르브라우어라이,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칼스루에의 ZKM 모두 과거를 보듬은 채 현재가 살아 있는 공간이다.
'작은 문화·생활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우파 파브릭(ufa Fabrik)은 1920년대 필름영화제작소가 지원하는 필름현상소였던 곳이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기면서 현상소는 동베를린 지역에, 촬영소는 서베를린 지역으로 나뉘게 되면서 기능을 잃어버려 유기된 공간이 됐다.
1968년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대에 학생들이 군 면제를 위해 베를린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생활 공간이 형성됐다. 이때의 건축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극장은 국제문화센터로, 식당은 연극 공연장으로 바뀌어 살아남았다.
타클레스 공간은 더욱 극적이다. 1907년 건설 이후 거대한 백화점으로 활용했던 이곳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의 관리를 받는 과정에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다. 여러 차례 폭탄 공격에도 완파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흔적은 건물 내부 곳곳에 있는 총·포탄의 잔흔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베를린 지역에 위치한 타클레스 예술의 집(Kunsthaus Tacheles)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90년 4월 철거될 운명에 처했지만 1990년 2월 세계 도처에서 찾아든 젊은 예술가들이 점거(Squat)하면서 살아남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건물은 어둡고 차가운 실내, 낙서 (또는 그래피티) 가득한 공간임에도 베를린 관광객이라면 꼭 들러야 할 명소로 꼽힌다. 발하우스(Balhaus Naunystrasse), 쿨투르 브라우어라이(Kultur Brauerei)나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Kuenstlerhaus Bethanien)도 과거를 그대로 담고 있기는 마찬가지.
발하우스는 19세기 베를린의 전형적인 사교댄스장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무도장은 음악당이 됐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베를린의 역사와 함께 연주를 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맥주 양조장(Brauerei)이었던 브라우어라이는 이제 문화(Kultur) 공간으로 변해, 말 그대로 '문화 양조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건물은 예전 건물의 용도를 엿볼 수 있는 명칭도 그대로 둔 채 활기찬 문화공장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베타니엔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시절(1850) 지어진 병원으로 건축양식만 봐도 '악마로부터 보호해 주는' 종교적 의미가 굉장히 풍겨나는 독특함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1961년 세운 장벽 근처에서 이를 넘는 사람들이 총 맞아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이곳은 1968년 병원이 문을 닫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예술가들의 점거(Squat)로 살아남은 베타니엔은 이제 세계의 작가들이 머물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할 꿈을 키우는 '예술인촌'이 됐다.
영국·독일에서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후원:지역신문발전위원회)
♠ 상흔도 보다듬은 예술공간…독일 대규모 미디어 센터 ZKM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칼스루에(Karlsruhe)에는 대규모 미디어 센터 ZKM(Zentrum fuer Kunst und Medientechnologie, 미디어·아트센터)이 있다. 지상 5층의 복합건물인 ZKM은 길이가 500m에 폭 1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10칸으로 나누어진 공간 미디어와 관련한 미술관·극장·도서관·박물관·연구소 외 현대미술관, 기획전시실, 미술학교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남아 있는 탄약공장이었던 이곳이 예술이 넘치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정말 극적이다.
인구 29만의 도시 칼스루에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쇠퇴로 많은 공장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 나가면서 도시 부흥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1980년대부터 이와 관련한 계획이 추진됐는데 당시에는 사통팔달의 철로 요충지였던 점을 감안, 중앙역사 주변 공터에 미래지향적이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예술적·친환경적인 랜드마크를 지으려고 했다.
국제공모를 통해 당선작(렘 쿨하스의 작품)까지 정했지만 막대한 재원 조달이 문제였다. 장기간의 논쟁 끝에 대체 건물로 선택된 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시 탄약공장으로 쓰였던 '칼스루에 아우스크부르크 산업공장'(Industriewerke Karlsruhe Augsburg)이었다.
기존 공장을 개조하는 것이었기에 원안보다 예산도 훨씬 줄어들었다. 이후 이 탄약공장은 세계에서 유일하면서도 거대한 미디어·예술 센터로 태어났다. 크리스티아네 리델(Christiane Riedel) 총괄 매니저는 "패전국으로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공장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면서 칼스루에 시민들의 문화적 자부심이 몰라볼 정도로 높아졌다."고 말했다.
영국·독일에서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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