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서오이소! 2007 경북방문의 해] (45)文鄕 영양

쏟아지는 별빛마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쏜살 같다, 시간이.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보면서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하면서 상념에 젖게 된다. 세월이 흐르는 속도는 나이 먹어감과 비례하는 것 같다. 우리가 세월이 빠르다, 혹은 느리다고 느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빨리 어른이 되고픈 유년·학창시절, 참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꼈었다. 이는 그 당시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지식이나 경험을 스펀지처럼 마구 흡수하기 때문에 기억의 축적량이 많아서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고 지각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주일, 한달이 금세 지나간 것 같다면 나의 일상은 지적 충격이나 새로운 경험의 기억 없이 하루하루가 반복된다는 증거이리라.

12월이 시작되는 이즈음 문향(文香)의 고장 경북 영양으로 떠나 문학과 자연 그리고 전통의 그윽한 향기를 오래 추억한다면, 혹시 세월의 자락을 잡을 수나 있지 않을까.

◆문예의 향기를 찾아서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 교수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일월면 주실마을.

한양 조씨 집성촌인 마을 중앙부에 호은종택(조지훈 생가)이 있다. 이 종택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붓끝 모양으로 생긴 문필봉이 있고 옆엔 연적봉이 자리해 있다. 여기에 물을 대어 주는 골짜기(注谷)가 있어 주실의 글은 마를 날 없어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예전 60여 가구가 살았는데 박사만 14명이요 한 마을에서 인물 많이 나오기로 여기만한 곳이 없을 정도다.

또 이 마을은 '재물·사람·문장을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 정신을 전통으로 간직해 인생을 당당하게 살도록 했다. 조지훈의 지조 있는 선비의 삶도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일 것이다.

주실마을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지난 5월 개관한 지훈문학관. 입구에 들어서면 그의 대표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선생의 삶과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 지훈 선생이 투병 중에 여동생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도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한달 평균 1천500여 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기자가 찾은 이 날도 서울문예협회 회원 80여 명이 함께했다.

영양이 자랑하는 또 다른 문풍(文風)의 터전인 석보면 두들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두들마을은 재령 이씨 집성촌으로 석계 선생과 그의 아내 정부인 안동 장씨가 살았던 석계고택 등 전통가옥 30여 채와 정부인장씨예절관 등이 있다. 또 소설가 이문열 선생의 고향으로 이곳에서 보낸 유년기의 삶이 그의 여러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광산문학연구소도 이곳에 있다.

특히 정부인 장 씨가 후손을 위해 직접 쓴 '음식디미방'은 현존하는 최고의 한글 요리서. 두들마을 초입의 전통한옥체험관에서는 음식디미방의 조리법에 따라 맛을 재현하고 음식차림을 갖추어 놓았다.

녹도나화·대구껍질누르미·석류탕·숭어만두·섭산삼 등 이름마저 낯선 음식을 칠첩반상, 코스요리 등으로 묶어 계절에 맞게 반가(班家)의 정갈한 맛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 1인분 3만 원에서 5만 원선. 재료준비 관계로 미리 예약해야 한다(054-680-6043·영양군청 관광개발계). 영양군은 '음식디미방'을 브랜드로 상표등록을 마쳤으며 영양의 대표음식으로 키우고, 외식산업 진출을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잊어버린 꿈을 찾아서

바쁜 일상 속에서 하늘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가? 더욱이 밤하늘을 쳐다보며 어린 시절 가리켰던 내 별을 찾아본 적 있는가. 도시의 희뿌연 밤하늘에서 하나, 둘, 셋 세기엔 흔적조차 희미한 별이다.

해와 달의 정기를 품은 청정한 땅 영양에선 새까만 밤하늘에 별을 뿌려놓은 듯하다. 수비면 일월산 자락 높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반딧불이천문대. 전국 최초로 지정된 영양반딧불이 생태체험마을 내에 있다.

청정일수 250일을 자랑하는 이곳이지만 그래도 겨울이 별자리 관측에 적격이라고 한다. 황소·오리온·마차부·쌍둥이·큰개자리…. 12월 초 밤 10시면 겨울철 별자리 향연의 절정을 이룬다.

일월산 위 동쪽에서 서로 기다란 겨울 은하수가 걸쳐져 있다. 주위는 고요하고 칠흑같이 어둡기에 굳이 굴절망원경이 아니라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그 이름만으로 설레고 가슴 떨리는 은하수. 이곳에선 고개 젖히면 은하수가 흘러간다.

이번 '어서오이소' 여행팀은 귀한 공연을 보는 행운도 누렸다. 수하청소년수련원에서의 승무와 영양원놀음 공연이 그것. 조지훈 선생의 시 '승무'처럼 얇은 사 하이얀 고깔 쓰고 긴 소매깃 휘날리며 춤사위가 벌어졌다. 최동선(54·여) 해동춤연구회장이 천지인의 조화 가운데 인간사 희로애락 삶의 몸짓을 표현한 북 장단엔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 영양지방에서 조선 중기 때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던 영양원놀음을 최근 복원, 무대에 올려 관객들의 흥을 돋웠다. 원놀음은 농한기에 민초들이 직접 원님과 육방관속, 지주 등의 역할을 정하고 자신들 애환을 송사(訟事)놀이를 통해 풀어나가는 연희. 걸쭉한 입담과 후련한 풍자를 통해 위정관이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라는 간절한 바람을 녹였다.

영양원놀음은 근대 들어 맥이 끊겼다가 올해부터 군과 보존회를 중심으로 복원해 전체놀음을 체계적으로 구성했는데 향후 상설공연을 준비한다고 한다.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무형의 정신자산을 풍부하게 하는 문향(文鄕)의 노력이 돋보였다. 참가 여행객들 저마다 느꼈으리라, 문화 향기 가득 안고 돌아간다는 것을.

이석수기자 sslee@msnet.co.kr

영양·김경돈기자 kdon@msnet.co.kr

♠ 주머니 팁

첫날

점심 된장찌개 정식 5,000원

반딧불이 생태학교·천문대 입장료 성인 2,000원 청소년 1,000원

저녁 수하청소년수련원 정식 5,000원

숙박 검마산자연휴양림 3인실 50,000원(주중 30,000원), 4인실 55,000원(주중 32,000원)

둘째 날

아침 정식 5,000원

점심 일월산 산채정식 7,000원

주실마을 지훈문학관 무료

두들마을 예절관·체험관 무료

♠ 경험자 Talk

▷류병옥(75·서울시 은평구 신사동)=각종 공연이 너무 좋았다. 원놀음에선 직접 무대로 올라 함께 어울렸다. 특히 영양군청 공무원 여러 명이 직접 나와 일정 내내 안내하고 설명을 도와주는 모습에서 감명받았다.

▷손미령(37·여·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영양이라면 고추밖에 모르고 왔는데 생각보다 볼 것이 많았다. 산촌박물관, 천문대 등이 다른 곳보다 특색 있다.

▷고미성(29·여·서울시 중랑구 상봉동)=공기가 다르다. 청정지역임을 느끼겠다. 반딧불이생태공원은 여름에 다시 오고 싶다.

▷유금자(54·여·서울시 송파구 오금동)=한옥마을을 보니 이런 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월산 산채를 먹어보니 약이라고 느껴진다.

*이번주 여행코스:주실마을(조지훈 문학관)-서석정-산촌생활박물관-반딧불이 생태학교-반딧불이 천문대-선바위 관광지구-두들마을(전통한옥마을 다도체험)

*'어서 오이소' 다음주(8, 9일) 코스는 '풍력발전소 해맞이와 금강송-청송·영덕·영양'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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