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평 남짓한 좁은 단칸방. 두 살 터울의 삼남매가 올망졸망 방 한쪽에 앉아 숙제를 한다. 첫째 보람(12)이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큰 눈망울을 끔뻑이며 문제 풀이에 열심이다. 둘째 보은(10·여)이는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냉기가 사타구니까지 파고 든 탓이다. 냉골에 익숙한 듯 보람이는 미동이 없다. 막내 보희(8·여)는 지겨운지 금세 몸을 웅크린 채 누워 버린다. 그리곤 슬금 슬금 기어와 엄마 이진숙(가명·48) 씨의 품에 안긴다. 얇은 이불로 막아낸 냉기가 모녀 품까지 파고든다. "엄마 추워." 보희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한파가 불어닥친 3일 밤. 창문 틈새로 날아든 냉기를 엄마는 막아내지 못했다. 아빠의 폭력에서 아이들을 잘 보호하지 못했던 엄마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추위 앞에 또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잘라내도 끝없이 엄습하는 암덩이처럼 엄마의 가슴 속에는 핏빛 응어리가 쌓여가고 있다.
삼남매의 엄마는 2년 전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헛구역질을 하는 날이 늘었지만 병원을 찾지 못해 키운 병마였다. 다행히 절반 이상의 위를 잘라낸 후 생을 이을 수 있었다. 석 달의 시간이었다. 병상에 누워있었던 100일의 시간. 하지만 엄마는 갑작스레 찾아온 암덩이마저 죄책감으로 물리쳐야 했다.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한 아빠(53)가 아이들을 보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빠는 삼남매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밥을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단칸방에 갇힌 채 아이들은 세상과 단절됐다. 그 사이 아이들은 수없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마와 싸울 기력으로 엄마는 남편과 맞섰다. 남편의 손에 흉기가 들리던 날, 엄마는 그로부터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현재 안동의 한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다.
"새색시 같은 사람이에요. 수줍음 많고 다정한 사람이었지요." 엄마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 술만 끊으면 예전의 남편으로 돌아오리란 믿음 때문이다. "본인이 진 업보는 다 갚아야지요." 엄마는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뿐이란 것을 잘 아는 듯했다. 하지만 아빠의 폭력을 쉽게 잊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엄마는 오늘도 속이 상한다. "아빠 보고 싶어?" 엄마의 물음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엄마는 "찬 냉기보다,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현실보다 아이들의 눈빛에 담긴 절망이 더 괴롭다."고 했다.
깊어가는 겨울, 따뜻한 방 한 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엄마에겐 그럴 능력조차 없다. 위암 수술 후 만신창이가 된 몸뚱어리 하나가 엄마가 가진 전부다. 월 90만 원의 정부보조금을 받지만 남편 병원비 25만 원과 월세 20만 원을 빼면 네 식구 생활비로 45만 원이 남을 뿐이다. 식당이라도 나가볼 요량을 해 보지만 삼남매가 눈에 밟혀 더 이상 일을 나가지 않고 있다. 간혹 끝간 데 없는 통증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정기검진도 받지 않는다. 삼남매 끼니와 교육비가 먼저란 생각에서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삼남매는 엄마를 지극히 챙겼다. 둘째는 엄마를 치료할 간호사가 되는 게 꿈이라 했고 첫째는 돈을 많이 벌어 엄마에게 드리는 게 소원이라 했다. 엄마와 삼남매의 춥고 비좁은 단칸방 생활은 아이들의 작은 희망으로 힘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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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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