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에밀레종

20년 걸쳐 납형법 첫완성한'신라인 열정'

벌써 12월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종을 친다. 우리가 듣는 보신각종은 복제품이다. 진품의 여운이 없다. 진품은 경주박물관에 안치돼 있다. 높이가 3.75m, 둘레가 7m, 두께는 아래가 22cm 위쪽은 10cm, 무게는 18.9t이나 되는 거대한 종이다.

이 에밀레종은 소리가 엄청나게 크지만, 이슬처럼 맑고 영롱하다. 큰소리는 맑기 어려운 것이 세상 이치인데, 장중함과 맑음의 상반된 미감이 이 종소리에서는 공존한다. 형태도 위쪽은 불룩하게 부풀고 끝마무리는 슬쩍 오므려 팽창감과 포만감을 주는 긴장미가 있어 정중하면서, 종 어깨에서 몸체를 지나 허리에서 마감하는 곡면은 유려함을 드러낸다. 에밀레종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형태와 소리를 지닌 '신종'(神鍾)이라고 극찬을 받는다.

1천300년 전, 20년에 걸쳐 신라 사람들이 만들었다. 긴 제작 기간은 제작 기법 차이에 있었다. 우리나라 종의 특징인 납형법(蠟型法)으로 처음 제작된 종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고, 긴 여운을 가진 종소리를 위해서는 종래의 주조법인 만형법(挽型法)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기술 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시행착오가 20년을 소비했을 것이다.

20t의 주조체는 치과에서 매일 접하는 금니(크라운, 손상된 치아에 덮어씌우는 것)로 환산하면, 500만 개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초(burn-out wax)를 이용해 금관모형을 조각하고, 매몰재로 거푸집을 만들어, 예열기에서 가열하면 초는 완전히 연소돼, 금이 들어갈 빈 공간이 거푸집 속에 남게 된다. 여기에 금을 녹여 강한 압력으로 그 빈 공간에 일시에 밀어넣음으로 금관을 만들어 내고, 잘 다듬어서 환자의 입안에 장착하게 되는 것이 납형법을 이용한 치과 보철치료의 한 과정이다.

납형법의 핵심은 초가 완전 연소돼 찌꺼기가 남지 않은 깨끗한 빈 공간을 거푸집 안에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에 금을 넣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포를 제거하는 것, 그리고 유려한 외면을 형성하는 것이다.

옛날에 신라인들은 초 대신에 밀랍을 사용했다. 당시로는 온 나라를 상대로 해도 버거운 양인, 2천개 이상의 벌통에서 밀랍을 채취해야 했다. 또 30여t의 쇳물의 압력과 1천℃가 넘는 고온에 견딜 수 있는 거푸집(鑄型)을 만들어야만 했다. 주조 전 과정에서 그 온도를 유지할 기술이 필요했으며,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포를 없앨 장치도 고안했을 것이다.

밀랍채취는 1년에 한 번만 하므로, 주조를 실패하면 1년을 기다려야만 한다. 20년의 제작기간은, 20번의 주조 실패를 의미한다.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을 바뀌어 오늘의 에밀레종을 완성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신라인들은 자원과 기술의 부족을 극복하고, 소리는 장중함과 맑음으로, 형태는 정중하면서 유려한 상반된 미감을 조화롭게 이뤄냈다. 오늘날에도 복제가 불가능한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었다. 그 원동력은 '소리를 듣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는 열정이다. 장황하게 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치과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자세를 스스로 다 잡아보기 위해서다.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최성진(최진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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