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아, 설레느냐? 12월 19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느냐? 그날은 너의 손으로 처음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참 많이 컸구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비로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너의 작은 손으로 정부를 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답답한 심정도 숨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일찌감치 후보의 정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고 투표할 기회를 빼앗겨버린 탓이다. 오로지 후보의 이미지와 구호로만 편을 가르는 선거판을 지켜보며 나도 솔직히 흥이 나지 않는다. 어쩌겠느냐? 그 누구를 탓할 것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엄중히 한 표로 판단하는 일뿐이다. 너와 나의 한 표만이 희망이다.
딸아, 머지않아 너에게 투표통지서가 배달될 것이다. 내가 너만 한 나이였을 때는 국가가 나에게 그 용지를 전해주지 않았다. 나는 국민이었으나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자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투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졌다. 죽음의 시대였다.
죽음을 삶으로 가까스로 변환시킨 게 1987년 6월이었다. 그 당시 다섯 살 먹은 너를 안고 시위대 뒤를 쫓아가던 일 아느냐?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게 해달라는 것이었지. 항쟁이었다. 국민들의 염원을 최루탄으로 잠재우려던 세력들을 잊으면 안 된단다, 딸아.
그때 흘린 눈물을 단지 추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단다. 눈물은 핏물이었다.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참고해야 한다. 너는 결코 '역사의 무뇌아'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는 부디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한 표를 던져라.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다. 민족이 갈라선 지 60년이 넘었다. 60년이 넘게 싸우고 으르렁대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세월을 보냈다. 남북의 체제와 이념과 문화의 이질성은 모두 분단으로부터 나왔다. 치고받고 싸우면서 둘 다 가슴에 멍이 들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손을 잡아보자고 한 게 겨우 10년이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10년이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앞으로도 더 많은 약을 상처에 발라야 한다. 경제나 국방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북한은 남한하고 맞장 붙을 상대가 아니다. 가난하고 피곤해진 형제에게 발을 거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 같으면 동생한테 그리 하겠느냐? 딸아, 여전히 북한에 대해 각을 세우고 삿대질하는 자들이 있단다. 냉전시대로의 회귀를 존재의 목표로 삼는 자들이란다. 그들의 언행을 유의해서 관찰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너는 부디 이 민족의 사랑을 위해 한 표를 던져라.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청년백수'로 지내고 있는 딸아, 대통령이 일자리를 만들어준다고 믿지 마라.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환상에 속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일자리가 생긴다면 대통령 선거를 해마다 한 번씩 해도 좋겠지. 청년실업이란 말이 쏙 들어가게 될 터이니까. 너의 일자리는 대통령이 만드는 게 아니라, 너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에 넘어가서는 안 된단다.
이와 함께 제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왜곡된 경제논리를 그대로 추종하지 마라. 부동산 투기로 얻은 재산을 재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한 이 땅에 희망은 없단다. 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왜 좀 더 많이 나누어야 하는지, 경제적인 부가 왜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는지, 진정 경제에 관한 총체적인 사유와 토론이 필요한 때다. 모든 것을 경제 탓으로 돌리면서도 온 국민이 경제숭배주의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모순을 직시하기 바란다.
딸아, 이제 너의 한 표가 중요하다. 너의 한 표가 투표율이고, 너의 한 표가 정부고, 너의 한 표가 혁명이고, 너의 한 표가 너의 권력이다. 부디 너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라. 만약에 투표하는 날 다리를 다치게 된다면 기어가서라도 투표해라.
모처럼 쉬는 날이니 여행을 가자고 어떤 친구가 제의해오면 그 친구하고 절교를 하더라도 투표해라. 내가 먼 데 좀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아비의 말을 거역하더라도 투표해라.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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