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술

조선 중종 11년 별시문과 책문의 주제는 '술의 폐해를 논하라'였다. 술을 마시느라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술에 중독돼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늘고 술로 흉년 곡식이 다 없어질 지경에 있다며 대책을 물은 것이다. 이 시험에서 을과로 급제한 김구는 술은 폐해도 크지만 쓰임새도 많다며 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

술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닌 만큼 지배층이 간절한 마음으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술의 폐해를 지적하는 책문과 대책으로 만난 중종과 김구 역시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때는 술의 힘을 빌렸다. 중종은 잠 못 이루는 밤 술병을 들고 찾아가 임금과 신하의 예를 버리고 서로 벗으로 상대했으며 깊은 밤 둘은 마음이 가는 대로 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술꾼들은 술은 '술술 넘어간다고 술이라 한다'고 우스개를 하지만 옛 어른들은 술 酒(주)자를 풀어 병아리가 물을 마시듯 조금씩 음미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술은 酉(유)시에 먹고 그쳐야 하며 戌(술)시까지 이어지면 개가 되고 다시 亥(해)시까지 뻗치면 돼지처럼 짐승이 된다고 경계했다.

우리 역사의 주당으로 꼽히는 인물에는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가 단연 압도적이다. 술과 시서음률로 당대의 문인 학자들을 매혹시킨 황진이를 필두로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를 읊은 임제와 두주불사의 변영로, 술에 관한 한 신출귀몰의 조지훈 또한 주당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주지육림에 파묻혀 술과 시로 한 시대를 살다 간 연산군도 뽑힌다.

세상을 등진 채 권력을 조롱했던 김삿갓과 김시습, 성속에 구애받지 않은 원효 등 또 다른 주당그룹의 면면을 보면 술은 제도와 규율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지도 모른다. 엄격함 대신 파격성을 엿보게 한다. 술은 사람을 방약무인하게 만드는 악마라고 한 셰익스피어의 말은 술의 양면성과 파격성을 잘 보여준다.

몇 해 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국민정신질환 실태조사에 따르면 18~65세 사이의 남녀 16%가 알코올로 인한 정신질환 환자라고 진단한다. 전문의들은 아예 성인 남성의 30%정도가 알코올 환자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시 연말이다. 이래저래 술 마시는 자리가 많아지고 술 권하는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독약 대신 우정과 사랑의 명약을 나눔이 어떨까.

서영관 북부본부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