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장미다방

12월은 하얀색입니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기둥 1+1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눈이 쏟아진 탓입니다. 굽어진 2가 동그랗게 말리면서 몸을 움츠립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한 해의 기억을 쓸어안으려는 몸짓입니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다들 습관처럼 하얀 연하장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준비합니다.

몹시도 추웠던 겨울입니다. 한 사내가 녹색일색인 세상에서 백색 겨울의 단 꿈을 꿉니다. 화선지 몇 장과 붓 펜 몇 개 그리고 채색도구들을 마련합니다. "송구영신" 연하장과 "성탄축하" 카드를 직접 그리려합니다.

기억 통을 열고 한 사람씩 꺼내 펼칩니다. 도무지 끝이 없습니다.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서로 엮여 덩어리째 쏟아집니다. 하나씩 풀어헤쳐 일일이 그 이름을 적습니다.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는 아날로그방식이 가장 좋습니다. 부모님, 형제자매, 친인척, 불알친구, 고교친구, 대학친구, 선생님, 선배님, 후배님, 사회친구... 행여 빠질세라 몇 번이고 기억의 방을 들락날락합니다.

매(梅), 난(蘭), 국(菊), 죽(竹) 사군자 중에 겨울에 어울리는 매화, 난초, 대나무를 택합니다. 사람과 군자들의 이미지를 연결해 봅니다. 향기와 우아함 그리고 절개, 그러고 보면 사람마다 각각 가진 향기와 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심성도 다릅니다.

하루 종일 엎디어 그림을 그리고 사연을 적습니다. 석양에 밀린 겨울바람이 창문을 두드릴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옛 속세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뭔가 허전함이 남습니다. 안절부절 불안한 모양새로 한 장 남은 화선지를 응시하던 사내, 문득 자신을 위한 연하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송(松). 소나무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더덕더덕한 껍데기와 뾰족한 이파리, 꽃조차 없는 소나무가 자신을 닮았다고 여깁니다. 굵은 줄기를 대충 스케치하고는 잔가지 몇 개를 그어놓습니다. 그리고 꼼꼼하게 솔잎을 매달기 시작합니다. 두 낱이 하나로 묶여 쌍을 이룬 솔잎을 그리려면 짧고 가는 선을 수도 없이 그어야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화가들은 농담기법을 활용하여 대충 얼렁뚱땅 그리곤 합니다.

사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힙니다. 투박한 손으로 그려낸 선들이 처음 그린 고목을 햇순 가득한 울창한 거목으로 바꿉니다. 사내는 자신의 연하장에 자신을 위한 글을 적습니다. '군자(君子)는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하고, 소인은 남의 이목(耳目)을 위해 행한다.' 그리고는 주소 하나를 기억해 냅니다. 입영할 때 들렀던 화천 버스터미널 옆의 『장미다방』, 제대할 때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정태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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