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친구 모임에 갔을 때다. 한국 남자 몇 명만 모이면 정치 얘기로 지새우는데 술 한두 잔 들어가니 어디 빠질 수가 있나.
사회적으로 꽤 성공했다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끄집어냈다. "대선에 가장 많이 출마한 사람이 누구지? 그 사람 찍을 거야." 그러자 옆자리의 친구들이 거들었다. "아니, 제일 잘생긴 후보를 찍을거야." "국회의원 수를 확 줄이겠다는 후보가 있던데 제일 낫더라."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보수의 本鄕(본향)이라는 대구에서, 그것도 사회활동이 가장 왕성한 40대 중반끼리 모여 이런 말을 주고받는 모습은 정말 낯설다. 예전 같으면 이미 찍을 후보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가.
5년 전 이맘때에도 그런 모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한둘 아니었다. 고교 동기 10여 명중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회창 후보를 찍는다고 했고, 소수였던 反(반)이회창 그룹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심하게 질타를 받았다. 손가락질이 난무했고 결기 센 친구들은 "여기서 나가라."는 모욕적인(?) 언사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대개 찍을 후보가 없다고 한다. 마뜩지 않은 후보뿐이란다. 길거리 벽보에는 무려 12명의 후보가 나와 화사한 웃음을 띠며 수많은 구호를 내걸고 있는데도 말이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실제 그럴만도 하다.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는 유력 후보들의 꼴이 말도 아니다. 그들은 보통사람의 잣대에도 맞추기 어려운 이들이 아닐까?
먼저 우여곡절 끝에 인물검증의 관문을 넘어섰다고는 하지만, (뭔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한때 사기꾼 일당과 어울렸던 원죄를 지울 수도 없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의심받는 후보가 있다. 그런데도 일부 세대와 계층의 열렬한 맹신, 기업인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니 사람들은 귀가 없는 것인가, 눈이 없는 것인가. 거기다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촛불을 들고 상대의 약점이나 물고 늘어지면서 '상대 잘못이 나의 경쟁력'이라 믿는지 모르겠으나, 내공이 부쩍 얕은 것으로 보이는 후보도 있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책임없이 행동해도 일정 지분을 챙길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하기 짝이 없다.
의리나 근본은 안중에도 없고 '꿈이여! 다시 한번'을 외치는 과거회귀형 후보도 있다. 소박하기 짝이 없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여전히 선호한다고 하니 절망적인 생각만 들 따름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어렵게 원내로 진입시켜준 지지자들의 열망을 저버린 채 정파 이해에 따라 추대된, '그 나물에 그 밥' 인상을 심어주는 후보다. 그것도 기득권인지 모르겠지만, 세상 물정(시대 흐름?)을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에 대한 모욕일 수밖에 없다.
인물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제대로 된 정책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유력 후보들이 그동안 내놓은 공약이라는 것은 듣기 좋은 구호만 이리저리 모아놓았을 뿐이다. 얼핏 생각해도 실현 가능성이 반반에 불과할 것 같은 '한반도 대운하'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국민들, 특히 '백수세대' 20대가 가장 관심을 갖는 일자리 수도 후보마다 5년간 수백만 개씩 창출하겠다고 하지만 설득력 있는 방법론은 누구하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데도 투표장에 가야 할까. '민주사회에서 투표는 最惡(최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했다지만 마음이 썩 편치 않다. 인물이 문제인가, 제도가 문제인가? 인물도 '도토리 키재기'이고 사기꾼 일당 같은 변수에 요동치는 선거라면 더이상 기대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상식과 거리 먼 풍운아(?)가 바람몰이로 정권을 잡고 자기 고집만 부리고 있어도 제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을 볼때 그 해답이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다. 내각제든지, 이원집정제든지 새로운 제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투표장에서 '次惡(차악)'밖에 고를 수 없다니 누구 말마따나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 아닌가.
박병선 기획탐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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