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떠나는 임창용에게

임창용에 대해서는 와전된 소문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두주불사라는 소문인데 정작 임창용은 술을 전혀 못한다.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붉어지니 마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못 마시는 체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와의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으니 소문이 날 법도 하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친한 동료, 선·후배와의 자리는 술을 마시지 못해도 거절하지 않는다. '애니콜'이라는 별명처럼 서로가 통하면 등판도, 만남도 계산을 따지지 않는 것이 그의 성격이다. 실제로 그동안 신문 지상에서 보여진 다소 계산적인 이미지는 사실 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와전된 것이다.

1999년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삼성으로 오게 된 임창용의 임무(?)는 '우승 청부업자'였다. 임창용은 75kg의 체중으로도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타고난 재질을 가져 삼성에서의 9년 동안 75승42패108세이브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승에 기여한 결정적인 흔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7승을 올린 2002년에도, 2005년과 2006년에도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상은 별로였다. 그래서인지 임창용은 삼성의 연고팬에게는 그의 스피드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심지 못했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에 코칭스태프의 믿음과 상반되는 불운이 뒤따랐다.

1999년 3승1패로 앞선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호세에 9회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맞았고 7차전에서도 임수혁에 9회 동점 투런포를 맞고 연장에서 패해 다 이긴 경기를 목전에서 두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마무리 투수로서 3분만 버텼으면 한국시리즈에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2001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7회 폭투로 동점을 내주면서 희망이 꺾였던 장면도 있었다. 그 불운의 공통점은 모두 직구였다.

뒤이어 악재도 따랐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 결혼 1만에 이혼을 하면서 그 과정이 여과없이 대서특필되었고 2004년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하면서 삼성과의 계약 이후 계약을 철회하고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파동도 겪었다.

돌이켜보면 삼성에서 보낸 지난 9년간 그는 참으로 불운하고 고독한 에이스였다. 무엇이든 뚫고 지나가는 광속구인 듯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에 태연하게 공을 찔러넣는 대범함으로 '창용불패'의 닉네임을 얻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할 때 해태에 그냥 남아 있었다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삼성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무대인 일본에서 또 다른 인연과 조우한다면 잠재한 화산이 터질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권오준으로부터 잠시 배운 체인지업을 금새 반은 터득할 정도로 천재성을 지닌 임창용이 아직도 시속 150km의 빠른 볼을 구사할 수 있어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초지일관 야구에만 전념하고 선수생활이 끝나면 그때 결혼을 생각하겠다는 그의 각오도 한 몫 한다면 말이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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