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책을 읽는다] 내 안에 묻어뒀던 해묵은 상처

채식주의자/한강 지음/창비 펴냄

10여년 전이었던 것 같다. 자주 놀러가던 중고음반가게 주인이 어느날 소설 한편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책 제목이 너무 서늘한 느낌이었고, 덩달아 작가의 이름까지 너무나도 서늘해서 집어들게 된 소설인데, 다 읽고나서는 몸과 마음에 습기가 잔뜩 스며드는 것처럼 서늘하고 또 서늘했다는 것이다. 그 책의 제목은 '여수의 사랑'. 작가 한강의 95년도 작품이다. 그때 가게 주인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여수의 사랑'에는 'ㅅ'이 두 개나 들어있어요. 그래서 서늘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요? 작가의 이름은 '강'이에요. 물이 많아요. 습해요. 왠지 그런 것 같아요."

'한강'이라는 작가는 나에게 늘 '물기 많은' 사람이었고, 그의 작품은 늘 축축했다. 심지어 책날개에 박힌 작가의 사진에서조차 서늘한 습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한강의 책은 발간이 될 때마다 잊지 않고 사보았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과 '그대의 차가운 손'이 나왔고,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와 몇 편의 동화집도 발간됐다. 그리고 올 10월에 '채식주의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채식주의자'는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 '몽고반점'과 다른 두 편의 소설과 연작으로 구성돼있는데, 세 작품을 하나로 묶어 읽어도 무방한 연작소설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0년 전 소설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과 통한다. 평론가들은 두 작품을 '식물성의 상상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내 여자의 열매'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베란다의 나무로 변해가는 여자의 이야기이고,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길 원한다. 물론 식물적 상상력은 두 작품뿐만 아니라, 한강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한강의 식물적 상상력, 그로 인해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서늘함은 사실 상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은밀한 트라우마를 작가는 뛰어난 상상력과 탁월한 묘사를 통해서 독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 그래서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아프고, 책을 덮고 나면 서늘하게 몰려드는 습기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내 안에 묻혀뒀던 해묵은 상처들이 스물 스물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내 속에서 물이 출렁이는 것 같다.

이진이(대구MBC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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