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인간의 정신이나 사상을 담는 그릇입니다. 질 좋은 우리의 전통종이 제조방법은 대부분 사찰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달 경북도로부터 국내 첫 한지미술관 등록을 받은 청도 운문면 방음리 보갑사 내 영담한지미술관장 영담(54) 스님은 의외로 담담했다. 축하받을 일이긴 하나 아직은 할 일도, 갈 길도 멀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청도의 봄', '녹야원Ⅰ' 등 그의 작품 140여 점이 걸려 있는 미술관은 지난 5월 개장한, 청도에서도 외진 산골미술관. 그러나 전통 명품 영담한지의 숨결을 느끼고, 스님의 독특한 작품기법으로 다시 태어난 한지그림 앞에 서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500여 명이 넘는 방명록의 글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전통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는 놀라움을 반영하고 있다. 작품은 모두 2천여 점, 액자를 입혀 당장 내걸 수 있는 것만 500여 점에 달한다.
"양지가 들어오면서 우리 고유이름 종이를 놔두고 한지로 이름붙이는 것은 사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예부터 종이문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고려하면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20대 중반에 출가, 운문승가대학을 나온 그는 30여 년 동안 줄곧 '한지'를 화두로 삼고 연구해왔다. 한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릴 때부터. 한의사 집안인 그가 수없이 본 첩약 봉지가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한 장의 종이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는지 처음엔 몰랐다. "전통 종이는 아흔 아홉 번의 공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종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한 번 더 만져 백 번의 손길이 닿게 된다고 해서 백지(百紙)라고도 불렸지요."
그의 한지작품은 케일, 쑥 등 천연염료로 푸른색과 암갈색 톤의 색체에 부조회화 기법을 사용해 나무와 숲, 꽃 등 자연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한지그림이다. 또 종이를 덧붙이는 콜라주기법 등 멀리서 보면 직접 그린 것인지, 종이로 붙인 것인지 구별이 안가는 작품도 수두룩하다.
"한지 속에는 우리 조상의 얼과 혼이 담겨있죠. 맥이 끊긴 종이 6가지를 재현하는 등 현재 갖고 있는 전통 종이만 100가지예요. 견본집을 발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의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은 미술관이지만 언젠가 박물관으로 넓혀 미술 관람과 템플스테이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 또 전통 한지 공예학교를 만들어 종이의 맥을 제도적으로 이어가는 것을 꿈꾸고 있다.
"누군가는 할 일이지만 사찰에서 전해져 오는 전통 종이제조 기법을 전수하는 디딤돌 역할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종이가 좋아 함께한 30년, 그의 웃음이 해맑게 번진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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