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이가!'
지난날, 어느 대통령이 내놓고 큰소리친 말이다. 그 전부터 누구나 자주 쓰던 이 말이 그 뒤로 새삼 유행어가 되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의 입길에 곧잘 오르내리기도 했다. '우리가 남이가!' 이 발언은 물론 얼마든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동지나 동료들 또는 동학들의 합심이 나쁠 턱이 없다. 친한 친구끼리 마음 합치면 안 될 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남이가!'를 함부로 나무랄 수만은 없다. 흉볼 수만은 없다. 그 말로 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警句(경구)가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 바로 그 말을 일방적으로 칭송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배타적인 뉘앙스도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남이야 어떻든 우리가(내가) 알 게 뭐야!' '우리만 잘 어울리고 잘되면 그만이야. 남들이야 죽을 쑤든 밥을 굶든 우리완 아무 상관없어' 이런 따위 뜻도 거기 진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남을 강하게 갈라 치고는 남에서 등 돌리고 마는 낌새가 거기 진하게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 그 말이 지닌 양지와 음지, 그건 원칙적으로는 반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 속에 껴들고 보면, 양지보다는 음지가 더 짙게 끼쳐 있는 게 사실일 것 같다.
거리에서, 지하도 계단에서, 광장에서 또 슈퍼나 마트에서는 그 음지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면 과장일까? 도시의 횡단보도에서 좌우 통행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좁은 계단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무질서다.
앞에서 오고 있는 사람, 계단을 밟고는 마주 보고 오는 사람, 그들은 거의 안중에 없다. 나만 알아서 제 빨리 차고 나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서로 부딪치건, 상대방 앞을 가로지르건 전혀 무관심하다. 제 갈 길 제 멋대로 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공공건물의 문을 드나드는 풍경은 더 문제가 많다. 들고 나는 사람 가운데 자신을 양보하거나, 비켜서거나 하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자신이 들어서려다 말고 안에서 나오는 상대방을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잡고는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기적이다.
다들 제 깜냥대로다. 나만 있고 우리만 있고 남이 없다. '남 그 따위 내가(우리가) 아랑곳할 게 뭐야!'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없이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온 사회에 오직 나뿐이고 다만 우리뿐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만 설치고 우리만 나부대는 곳에는 사회가 없다. 公衆(공중)은 없고 잡동사니 군중이나 어중이떠중이의 愚衆(우중)이 있을 뿐이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우리는 남과 더불어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남은 나나 우리의 기틀이고 터전이다. 남들이 없어지면 그 순간에 나도 유야무야하게 된다.
이럴 때, 당대의 대표적인 서구 철학자의 한 사람인 E. 레비나스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남은 또 다른 나고 나는 또 다른 남이다.' 그렇게 말했다. 나와 남이 따로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거기 인간 윤리의 궁극이 있노라고 그는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 철인은 윤리학을 철학의 최정상에 올려 세우려 들었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 등이 종래에 차지하고 있던 철학의 안방에다가 윤리학을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의 윤리는 동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 온 것처럼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어른 아이, 스승 제자 사이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윤리다. 나와 남, 우리와 남의 관계야말로 윤리다. 그 점을 우리는 레비나스에게서 배워도 좋을 것이다.
말로는 그래도 실제로는 어려워할 것 없다. 횡단보도나 계단에서는 좌우 통행 지키면서 남을 비켜 가 보자. 어디든 좋다. 공공 건물의 문에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열린 문 한번쯤 잡고 서 있어 보자. 그러면서 '먼저 가시죠!' 말해 보자.
그걸로 우리 사회의 윤리는 환히 틔고 밝게 열릴 것이다. 내가 또 다른 남이 될 것이고, 남이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드디어는 '남도 우리야!' 그렇게 따뜻하게 다사롭게 말하게 될 것이다.
김열규(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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