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대선 엿새 전

개인의 품성 삭제된 이상한 선거…"믿음 잃으면 백약이 무효" 일깨워

하늘나라에서 처칠, 흐루시초프 등 세계의 명사들이 모여 정치와 선거를 주제로 간담회를 가졌다. 소련 총리 흐루시초프가 말문을 열었다. 정치인이란 결국 시냇물이 없어도 다리를 놓겠다고 공약하는 따위의 인간 아니겠느냐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옆에 있던 영국 수상 처칠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치인의 역할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인데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붙는다며 뜸을 들였다. 즉 예측이 맞지 않으면 그럴듯하게 둘러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 프랑스의 소설가인 카뮈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일도양단 식 결론을 냈다. 정치란 이상도 없고 위대함도 없는 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악덕이며, 자기 자신 속에 위대함을 지닌 사람들은 결코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주제가 선거로 옮아가자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 마디를 건넸다. 선거에서는 대중영합주의자와 엉터리 공약을 남발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가장 확실히 나라를 망하게 하는 방법이 선동 정치꾼들에게 권력을 맡기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다시 처칠에게 발언기회가 돌아오자 선거의 무용성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열네 번 선거에 출마했는데 선거 때마다 한 달씩 감수했다. 부질없는 말싸움으로 14개월을 헛되이 보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우울해진다"고 술회했다.

지나간 명사들의 정치 관련 경구를 각색하여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지를 짚어보았다. 정치란 결국 그럴듯한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허황된 꿈을 심어주고,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오리발을 내밀거나 핑계를 꾸며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100%의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실보다는 거짓이 정치의 참모습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지적에는 쉽게 공감이 간다.

대선이 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 앞에는 최선이야, 차선이냐, 차악이냐, 최악이냐의 4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아 최선은 아마 힘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주요 대선주자인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후보를 놓고 볼 때 대통령의 자질, 도덕성, 정치적 이력에서 한 가지 이상의 결점들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숯과 검정의 경합이다. 차선이라도 선택한다면 다행인 상황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개인적 결함은 동일조건으로 보고 국정운영 능력조건을 따져보는 것이 오히려 나을 듯하다.

정치의 궁극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러셀은 행복의 조건으로 인생에 대한 열의, 사랑, 가족, 일의 4가지를 꼽았다. 이것을 대선 공약으로 치환해보면 어떤 결과가 될까. 열의는 국가경쟁력과 공공개혁, 사랑은 복지와 사회기강, 가족은 교육과 민생, 일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로 연결된다. 안보 분야를 제외한 공약들이 대개 여기에 수렴된다. 이들 항목에서 누구의 능력이 가장 앞설지는 개개인이 판단할 몫이다. 무소속의 한계는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국회 없는 정부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대한 국가 경영을 일개인이 끌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능력이 있고, 정치세력에 뒷받침 되더라도 사람이 미덥지 못하면 민심을 모을 수 없다. 좌파정권의 '잃어버린 10년'은 믿음의 상실 바로 그것이다. 알다시피 이명박 후보는 공인의식이 가다듬어지지 않고 구질구질한 흠집이 많은 사람이다. 언변도 약하고 목소리도 호감을 주지 않는다. 그런 그가 상대후보들의 집요하고 거센 네거티브에도 꿈쩍하지 않는 이유는 믿음에서 앞서기 때문 아닐까. 입으로만 민생을 떠들고 행동은 공리공론을, 원칙을 내세우며 반칙을, 통합을 말하면서 분열을 도모해서는 믿음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이 이명박 45%, 정동영 16%, 이회창 13%의 이유일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과거에 대한 징벌과 미래에 대한 기대의 두 변수가 판세를 그리고 있다. 개인의 품성이나 자질, 약간의 실수, 공약의 충실도는 고려대상에서 사라졌다. 삶의 질을 개선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 민심이 움직이고 있다. 정치가 거짓말의 향연이라지만 이번 선거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어리석어 보이는 국민들을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경구가 새삼 무섭게 느껴진다.

박진용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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