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내용]솔가지 한 지게 지고 집으로...

다섯 시 반이면 해가 산을 넘는다. 도시에서야 해가 넘어간들, 해가 나타난들 무슨 상관이 이랴마는, 농촌은 하루의 끝을 서둘러서 갈무리해야 한다. 특히나 산에서 나뭇짐 지던 떠꺼머리들이나 야산에서 뛰놀던 닭들을 닭장에 넣으려는 조무래기들은 마음이 급해진다. 어둠에 쫓겨 마음 바쁜 시간이 지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아늑하고 행복한 시간이 찾아든다. 화로엔 흰떡가래나 군밤이 기다리고 있다. 매일 밤 그렇게 우린 다신 오지 못할 시간을 까먹으며 긴긴 겨울밤을 보내었다.

예전엔 모든 원료가 나무여서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 야트막한 산엔 자잘한 소나무들만 덩그러니 장승처럼 산을 지키고 있다. 소나무 땔감은 깊은 산까지 가서 해오는 장골들의 몫이라면 소나무 갈비는 아직 뼈가 덜 야문 초등생들이나 여드름쟁이 중학생 형들의 몫이었다. 한 번씩, 심심해서 몸을 또아리처럼 틀던 삼순이, 용례도 따라 붙을 때도 있었다.

그만큼 땔감으로 손쉬운 것이 소나무 낙엽, 즉 갈비이다. 왜 갈비라고 했을까? 소나무 잎이 갈비처럼 생겨서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갈비도 사람들이 하도 긁어대어 갈비 찾기가 쉽진 않지만 그래도 다시 찾으면 어떻게든 갈비는 있게 마련이었다.

손가락모양의 갈빗대를 긁으면서, 네 갈빗대는 새 거라서 길이 더 나야겠다느니, 춘식이꺼는 다 닳아서 갈비가 핫바지 방구 새듯이 다 샌다느니 하면서 갈빗대 타령을 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 잡듯이 샅샅이 긁어모은 갈비가 제법 두툼하게 쌓이면 갈빗대로 긁어모아 탁탁 두드려 가며 네모나게 쌓는다. 이렇게 해야 갈비끼리 엉켜서 잘 풀어지지 않는다. 한 다발, 두 다발 모은 갈비를 칡넝쿨로 단단히 포개면 여러 다발을 다시 칡넝쿨로 묶어 지게에 푹 찔러 넣으면 나무 지게에 한 짐이 되었다. 갈비는 무척 가볍지만 모양새가 커서 아이들이 갈비를 지고 가는지 갈비가 덜렁 덜렁거리며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번은 갈비를 긁어러 갔다가 꿩 새끼를 잡았던 기억이 새롭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산엘 오르다가 갑자기 "꼬공, 꽁 꽁"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장끼, 까투리가 산 아래쪽을 향해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아이들은 순간, 꿩 둥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꿩이 날아갔던 곳을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삐약, 삐약..." 병아리 울음소리처럼 꿩 새끼들은 제 부모들을 찾았다. 꿩새끼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어떻게 숨어야 할지 허둥대는 꼴이 우스웠다.

우리는 그만 신이 나고 또 나고야 말았다. 장끼 정도는 상대하기가 부담스럽지만 요까짓 꿩 새끼쯤이야... 우린 낄낄거리며 꿩새끼들을 몰고 다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장끼가 꿩새끼 두 마리를 낚아채고 산 아래로 날아가는 게 아닌가. 너무 갑작스런 일이 벌어져 우린 입만 벙하니 벌리고는 나머지 꿩 새끼들을 모는 일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그것도 잠시, 미처 제 부모가 못 챙긴 꿩 새끼 하나를 잡았을 때는, 서로 제가 하겠다고 옥신각신 입씨름이 벌어졌다. "내가 먼저 발견했다, 아이가" "머라카노, 내가 몰아줬다 아이가" "니 바짓가랭이로 도망갈 때, 내가 안 덮쳤나" 서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며 공치사하기에 바빴다.

우리가 서로 제 꿩이라고 다툴 때, 갓골에서 온 도형이는 신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때야 천지도 모르고 날 뛰던 천둥벌거숭이들이 도형이의 얼굴에 묻은 어둔 그림자를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촌에서 살기 힘들다고 도회지로 야반도주한 도형이 엄마가 생각났다. 아마 꿩새끼처럼 처량한 자기 신세가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갈빗짐을 한 짐 지고 와서 꿀보다 더 맛있는 저녁밥을 먹고 나면 슬슬 즐거운 화로 시간이 다가왔다. 화로는 흙으로 구워 만든 질화로, 무쇠로 투박하게 만든 무쇠 화로, 좀 사는 집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놋쇠화로가 있었다. 대부분의 농촌에선 무쇠화로를 사용했다.

화로 맨 밑바닥에 갈비를 깔고 저녁밥을 짓고 난 숯을 화로에 담아 고구마, 군밤을 구워먹으며 꿩새끼 잡은 이야기로 긴긴 겨울 밤을 보내었다.

지금의 안방 문화가 TV를 중심으로 하는 일직선형 구도라면 TV가 없던 시절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꽃을 피우던 원형 문화였다. 일직선형 구도는 서로가 단절된 개인화된 구도인 반면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주 앉은 구도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던 커뮤니케이션형 구도였다.

사십년 전에 TV 하나 없던 시절, 화로를 중심으로 한 가족문화가 새삼 그리워진다. 청송 덕촌동의 정승 열셋에 왕비가 넷이나 나왔다는 심부잣댁 송소고택을 찾아 민박으로 옛 추억을 대신해보자. 가족끼리 전래놀이를 즐길 수 있고, 깔끔하게 차려나오는 한식 백반이 일품이다.

문의사항은 054-873-0234/5, 016-317-5158.

김경호(아이눈체험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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